진시황 다시 보기

배재신문l등록2017.06.14 16:10l승인2017.06.14 16: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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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필자의 첫 중국여행은 20년 전 베이징에서 시작됐다. 베이징은 춘추시대 연나라 수도였고, 현 중국의 수도라는 사실이 증명하듯 역사유적이 즐비하다. 그중 유구한 중국의 상징이자, 지구를 대표하는 건축물로 불리는 만리장성 여행은 아직껏 그 울림이 남아있다. 험준한 산줄기로 면면히 펼쳐진 장성의 형상은 거대한 산들이 장성에 묶여있는 느낌이고, 동시에 거대한 용이 내려앉은 형상이다. 이 험한 곳에 동원됐을 수많은 백성들의 애환과, 병사들의 치열한 전투 및 성벽 곳곳에 배어있을 피비린내의 상념은 잠시였다. 너무 오래된 탓도 있지만, 장관에 압도됐기 때문이리라. 그래도 진시황은 떠올랐다.

만리장성은 춘추시대부터 명나라 때까지 천오백년에 걸쳐 세워진 것으로, 통일이후 국가의 새로운 국방체제의 수립 차원에서 기획된 건축물이다. 그 기획자가 바로 진시황이다. 이후 만리장성은 국방상의 기능을 넘어, 황하유역의 협소한 ‘화하’ 중심의 중화문화권을 만리장성 일대까지로 크게 확장시키는 문화사적 의의가 더 크게 평가됐고, 지금은 막대한 관광수입을 가져다주는 보물이다. 필자의 첫 중국여행의 테마는 진시황이 되고 만다.

며칠 후 진시황을 찾아 서안으로 향했다. 서안은 진나라의 수도였던 함양이 소재한 도시로, 도시 전체가 중국 고대사 박물관이다. 역시나 서안의 유적지 중 가장 큰 울림이 있는 곳은 진시황릉과 병마용이었다. 산처럼 솟은 4면 피라미드 황릉과 다섯 개의 갱으로 구성된 병마용을 보게 되면, 누구도 뇌리에서 진시황을 지우지 못하리라.

이제 잠시 진시황에 대한 이해가 필요할 것 같다. 진시황은 성은 영씨, 이름은 정이다. 진나라는 영씨 왕조였다. 뜻밖에도 진시황은 BC 259년 조나라 한단에서 태어났다. 진나라 왕이 부친인 자초를 조나라에 인질로 보냈기 때문이다. 인질은 본래 국가 간 화친의 징표지만, 전쟁이 난무하던 전국시대에서는 거의 희생양이었다. 즉 자초는 진나라가 버린 왕손인 셈이다. 이런 자초가 뜻밖에 여불위라는 인물을 만났다. 여불위는 일종의 벤처사업가였는데, 그는 자초를 보고, ‘킹메이커’가 되기로 결심했다. 또한 자초는 여불위의 시녀인 조희에게 반해서 결혼했고, 아들 영정을 낳았다. 모친이 조나라 여인이니 오늘날에서 보면 진시황은 다문화가정 출신인 셈이다. 몇 년 후 여불위의 킹메이커 기획은 마침내 성공을 거둬 자초가 귀국하고 왕위에 올라 장양왕이 된다. 그리고 약속대로 여불위를 재상에 임명했다. 그 사이 영정은 조나라에서 8년간 극도의 고립된 상태에서 유년을 보내야 했다. 그런데 장양왕이 즉위 1년 만에 갑자기 서거하고, 14살의 영정이 왕위를 계승하게 된다. 이 때 모친의 중재로 영정 대신 여불위가 정사를 주관하고, 진시황은 모친의 뜻에 따라 여불위를 ‘중부(작은 아버지)’로 칭함에 따라 진나라는 여불위 천하가 된다.

이후 궁에서는 모친과 여불위의 관계에 대해 온갖 소문이 나돌고, 심지어 영정은 여불위 아들이라는 소문도 있었다. 그럼에도 영정은 여전히 효심이 지극했고, 또 능력으로 자신이 정정당당한 영씨 왕손임을 확인시켜줄 것이라고 자신했다. 그즈음 ‘요애의 반란사건’이 발생한다. 진시황이 20세가 되던 해로, 요애는 본래 모친의 시종이었지만, 사실은 오랜 연인으로 이미 두 명의 자식이 있었다. 이 때 진시황에게 큰 충격은 모친이 요애와 함께 자신을 살해하려했다는 사실이었다. 반란 진압 후 요애와 이복동생 및 관련자는 대부분 죽음을 면치 못했지만, 그래도 모친만은 잠시 별궁에 유폐했다가 곧 궁에서 여생을 마치게 했다. 한편 여불위는 귀양길에서 자살로 생을 마감한다.

이후 진시황은 재임 30년간 쉼 없이 일만했다. 결과 마침내 중국을 통일했고, 이후에도 계속 영토를 넓혔다. 한마디로 그는 일벌레였다. 밤을 새워가며 올라온 문서를 검토하고, 무려 5번에 걸쳐 전국을 직접 시찰하여, 동쪽의 태산 꼭대기에는 아직 그 흔적이 남아있다. 특히 타국에서 인질의 자식으로 태어나서 타지에서 공무수행 중 객사했다는 사실은 진시황의 고단했던 일생을 상징한다.

다만 만리장성을 기획했던 영명함과 불노불사를 추구했던 우매함,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인질에서 황제까지 극단적 변신이 어떤 영향을 미쳤을까? 문헌에는 궁녀에 대한 기록은 있으나 황후 관련 기록은 없다. 정식 부인은 두지 않았다는 의미다. 혹시나 모친 충격 때문은 아닌지...

지금 시진핑은 ‘중국의 꿈’을 말하며 일대일로를 추진하고 있다. 일대일로는 새로운 중화체제의 건설이라는 측면에서 제2의 만리장성이다. 시진핑은 화려한 팡파르 속에서 대업을 추진하지만, 진시황은 고독하게 대업을 이루었다. 그럼에도 후세에서의 여불위 아들 운운은 지하의 고독한 영정을 더 슬프게 할 것 같다.

                                                            기초교육부 이선희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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