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좋은” 번역의 조건: 문자/축자적 번역과 창작사이

배재신문l등록2019.07.07 20:45l승인2019.07.07 20: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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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설국』의 번역가 에드워드 사이덴스티커의 Snow Country는 “번역은 또 하나의 창작이다”는 언어학적 철학이 반영된 산물이다. 이 말은 외국어를 번역한다는 것은 한 언어를 다른 언어로 문자/축자적literal/word-for-word 옮김에 그치지 않고 동시에 하나의 작품을 결이 동일한 새로운 작품으로 창조해낸다는 의미이다. 그렇다면 번역은 다른 언어로의 옮김이자 창작의 과정이기도 하고 그 결과로 빗어진 완성된 산물로 볼 수 있다. 실제로 가와바타는 1968년 노벨문학상 수상연설에서 본인이 상을 수상하게 된 것은 온전히 자신만의 능력이 아닌 사이덴스티커의 창의력이 가미되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그는 수상상금의 절반을 그에게 보냈다. 글자그대로 번역하는 문자/축자적 번역의 단점은 옮긴 언어가 원작품의 문화적인 뉘앙스까지를 완벽하게는 아우르지 못한다는 것이다. 한국외국어대 최정화 교수(통역사)는 “번역은 언어의 중개자가 아닌 문화의 중개자”라고 말한다. 그녀는 훌륭한 번역가의 자질을 두 나라의 언어뿐 만 아니라 문화나 사고방식의 차이까지를 꿰뚫고 있는 사람으로 정의한다. “설국에 대한 단상”으로 부제를 붙인 「창작으로서의 번역」에서 유숙자 교수 또한 번역가의 특성이 ‘이중어의 사용자’이자 동시에 ‘이중문화의 체험자’라는 점을 강조한다. 같은 맥락에서 마리앤 레더러 역시 『번역의 오늘-해석이론』에서 외국문학을 번역할 때는 '창작의 단계까지는 아니더라도 글자 그대로의 문자 역 만으로는 한계가 있기 때문에 문화전반에 걸친 이해가 동반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봉준호 감독은 프랑스 칸 영화제에 출품하기 직전 자신의 영화가 “워낙 한국적인 것이라 외국인들이 100% 이해하기는 힘들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그는 영화제의 대상인 ‘황금종려상’을 수상하게 되었다. 그런데 영화/대중문화평론가를 비롯한 많은 사람들은 그것의 이유를 달시 파켓의 번역에서 찾고 있다. 영화가 상영되는 동안 외국인 관객들의 웃음이 끊이지 않았다고 전해지는 데, 그것은 봉준호 감독의 우려와는 반대로 그들을 폭소 짓게 한 달시 파켓의 번역이 한국인의 정서와 문화를 훌륭하게 반영했기 때문이다. 이에 영화평론가인 김효정은 그의 번역을 두고 “우리나라의 말을 서양의 문화적 맥락에 맞게 완전히 변화시킨 탁월한 것 이었다”고 말한다. 이처럼 번역은 한 언어(원어텍스트source text)를 다른 언어(번역텍스트target text)로 이른바 통사나 의미구조만을 고려한 채 막연히 기술적으로만 옮기는 것이 아니라 문화적인 배경까지를 고려하여 해석하는 과정이다. 『프랑스 중위의 여자』, 『모비 딕』, 『삼총사』등의 번역으로 잘 알려진 김석희 작가는 <채널예스>와의 인터뷰에서 문자/축자적인 번역의 제한성에 대해 지적한다. 그는 한 언어에서 다른 언어로 옮길 때 해석의 작가적 역량과 충분한 자유가 허용되어져야 한다고 말한다. 사실 문자/축자적인 번역에는 절대적인 한계성이 존재한다. 한강의 『채식주의자』Vegetarian(으)로 맨부커상을 수상한 데보라 스미스는 그녀의 또 다른 작품인 『흰』을 번역하면서 경험한 언어적인 고심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한국어에는 영어의 ‘White’에 대응되는 단어가 두 개 있는데, 하나는 ‘하얀’이고 다른 하나는 ‘흰’이다. 전자는 빨강이나 파랑처럼 그저 색상을 뜻하지만 후자는 의미가 다르다. ‘흰’에는 우울한 감정melancholy이 담겨 있다. 엄밀하게 말해 영어에는 이 말에 대응되는 단어가 없다.” 이처럼 한 언어를 다른 언어로 옮기는 데는 의미의 다양성과 차이로 인해 간단한 번역조차 어렵다. 더욱이 “더 좋은” 번역을 위해서는 단순한 옮김이 아니라 의역free/lose translation과 화용론적 지식이 가미된 ‘창작번역transcreation’이 필요하다. 창작번역의 훌륭한 예는 에드워드 피츠제럴드의 「오마르 카이얌의 4행시」를 들 수 있다. 이 시/집은 페르시아 출신의 오마르 카이얌의 12세기 4행시/집을 19세기 들어 피츠제럴드가 문화적 문맥을 고려하면서 자신의 생각과 상상력을 동원하여 새롭게 번역/창작한 것이다. 20세기 모더니즘의 정수로 평가받고 있는 「황무지」의 작가인 T. S. 엘리엇은 피츠제럴드의 이 “창작”을 읽고 난 후 “세상이 새롭게 보였다”고 말했다. 과연 피츠제럴드의 원본을 뛰어넘는 과감한 “창작”의 번역이 아니었다면 T. S. 엘리엇의 깊은 인상도 없었을 것이다. 그러기에 번역은 “번역”이 아닌 새로운 “창작”이 되어야 한다.

 

미디어센터장 영어영문학과 박윤기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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