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바이러스의 시대와 문학

배재신문l등록2020.04.20 18:20l승인2020.04.20 18: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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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 제공: 미디어센터장 영어영문학트랙교수 박윤기

 사라 쿨렌은 「코로나 시대의 문학: 소설속의 팬데믹」이란 칼럼에서 페스트를 다루는 문학을 개괄한다. 먼저 대니얼 디포우의 『역병의 해 일지』(1722)가 있다. 이는 1655년 런던을 휩쓴 선페스트를 바탕으로 한 기록이다. 작품에서 화자는 역병으로 괴멸된 가가호호를 방문해서 죽음의 처참한 상황을 포착한다. 그런데 이는 그 당시 역병을 사실그대로 정리한 사무엘 페피스의 과학적인 일지보다 더 사실적이다. 더 사실적이라는 느낌을 준다. 그것은 디포우가 보이는 사실에 감정을 주었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감정에 호소할 수 있는 것이고 감동을 줄 수 있는 것이다. 이렇듯 마음을 움직이는 것, 그것이 바로 문학이 지니는 힘이다. 메리 셸리의 『최후의 인간』(1826)도 역병과 관계된다. 대니얼 디포우가 『로빈슨 크루소』(1719)로 더 유명하다면 그녀는 『프랑켄슈타인』(1818)으로 더 유명할 것이다. 여하튼 『최후의 인간』은 역병으로 인한 종말적인 세상이 배경이다. 시대는 21세기 말엽이다. 코로나바이러스가 창궐하는 지금과 멀지 않다. 화자는 라이오넬 버니이고 최후의 생존자이다. 따라서 그는 외롭게 묘사된다. 그는 역병으로 인한 인류의 종말을 목격했다. 그런데 버니가 만나는 허구적 인물들은 실제의 인물에서 착안을 한 것이다. 작가인 메리에게 그들은 P. B.셸리와 바이런 등이었다. P. B. 셸리와 바이런은 모두 당대 최고의 시인이었고 오늘날 낭만주의를 대표하는 문인들로 평가받는다. 그리고 메리 셸리라는 이름에서 알 수 있듯 P. B. 셸리는 그녀의 남편이 되는 인물이다. 바이런 또한 어느 시기 셸리와 더불어 거의 매일을 함께한 무척이나 가까운 사이였다. 그러니 작품에서 역병에 의해 “그들”을 잃은 버니는 그야말로 애끓는 심경이었을 것이다. 메리의 심경이 투영되었고 실제로 그렇게 묘사된다. 그러기에 그것을 보는 우리도 감정이 동요한다. 이처럼 문학은 실제 삶의 반영이다. 감정의 이입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진실하다. 포르투갈 태생의 조세 사라마고의 『실명』(『눈먼 자들의 도시』로 번역되어 있음) 또한 역병에 관한 것이다. 작품의 배경은 이름 없는 한 도시이고 사람들은 실명한다. 팬데믹이긴 하지만 질병의 원인이 정확히 밝혀지지는 않는다. ‘코로나19(코비드19)’의 시대, 2020년 4월 20일 현재, 많은 사람들이 격리된 채 지내고 있다. 우리에겐 작은 불편이다. 그것뿐이다. 하지만 다른 나라로 시각을 돌리면 그렇지 않다. 세계의 더 많은 사람들이 격리된 채 살아간다. 철저한 고립이다. 도시는 봉쇄되고 국경은 폐쇄된다. 사재기가 극성이고 믿음이 약화된다. 곤란과 불안의 시대이고 고통과 혼란의 세계이다. 사라마고는 이러한 시대를 예견했다. 『실명』에서 그랬다. 이미 오래 전인 1995년의 일이다. P. B. 셸리는 시인은 문인은 예언가라 말했다. 가히 사라마고는 예언가였다. 문인이었기에 그는 예언가가 될 수 있었다. 실명한 사람들은 격리된다. 눈이 먼 것은 신체적인 장애이다. 육체적인 질병이다. 그러나 그들이 격리되는 곳은 병원이 아니다. 병원은 병원이지만 ‘mental asylum’ 즉 정신병원이다. 이유는 하나, 극단적인 두려움과 공포로 인한 것이었다. ‘코로나19(코비드19)’가 팬데믹으로 선포되었다. 그러자 세계인 중 일부는 다른 인종과 다른 나라에 책임을 돌렸다. 그들은 두려움과 공포를 극복하지 못한 사람들이었다. 인간에 대한 이해는 별개의 문제로 하고도 말이다. 이는 결국 외국인에 대한 편견과 차별을 강화시켰고 때로는 폭력으로 이어졌다. 인간의 무지가 그리고 사랑의 결핍이 얼마나 쉽게 타락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실례이다. 우리가 믿는 지성이 문화가 그리고 문명이 편협한 사고와 증오로 오염될 때 그러한 것들이 얼마나 얇고 부서지기 쉬울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명백한 실증이다. 물론 극히 일부의 일이다. 그럴 것이다. 그럼에도 그들의 공포는 킴 스탠리 로빈슨에게 책임이 있는지도 모르겠다. 아포칼립스에 대한 공포를 가중시켰을 수 있다는 한정적인 가정에서만 그렇다. 그는 『쌀과 소금의 시대』(2002)에서 과거 팬데믹의 시대를 조망한다. 중세 암흑기의 선페스트는 유럽 인구의 1/3을 희생시켰다. 그런데 로빈슨은 이 때 인구의 99%가 희생되었다면 이라는 가정에서 지금과는 사뭇 다른 서구의 모습을 상상한다. 마가렛 애트우드의 『오릭스와 크레이크』(2003) 에서는 스노우맨이 나온다. 세상은 종말을 맞았고 그는 종말전의 세계를 회상한다. 종말의 원인은 불분명하다. 하지만 유전자조작과 인간과 동물에 대한 무모한 실험이 단초가 되었다는 것은 자명하다. 로빈슨처럼 마가렛 역시 과거를 이야기 한다. 스노우맨의 플래시백에 의해서이다. 그는 종말 후 최후의 일인이다. 그의 삶은 그의 이름처럼 극도로 불안하다. 제프 칼슨이 있다 그리고 그의 『역병의 해』(2007)가 있다. 제프 칼슨 역시 역병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러나 그것은 바이러스에 의한 것이 아니다. 생물적인 특징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온전히 무생물적인 특성의 역병이다. 하긴 모든 바이러스가 어느 정도는 무생물이기는 하다. 하지만 어쨌든 제프 칼슨의 역병은 나노테크놀러지와 관계된 것이고 그러기에 그것은 “기계역병”으로 불린다. 전염과 치사율은 엄청나다. 따라서 기계역병은 인간의 종말을 예견한다. 하지만 이 역병에는 취약점이 있다. 고고도에서는 생존하지 못한다. 이 작품에도 생존자들은 있다. 그들은 살아남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 그들은 지식을 사용하며 지성을 확장시키고 불굴의 정신을 포기하지 않는다. 결국 인간의 삶은 소중하고 인간의 정신은 고귀하며 인간의 생존은 숭고하다. 생존자들은 콜로라도 록키마운틴과 같은 고고도의 지역으로 피신한다. 하지만 그것으로 그치지 않는다. 그들은 10,000피트 이상의 우주공간에서 힘겨운 삶을 버텨가면서 팬데믹으로부터 벗어날 가능성을 모색한다. 이것이 인간다운 인간의 모습이고 양도할 수 없는 생존의 권리이기도 하다. 코로나바이러스의 시대, 지금의 모습이고 오늘날의 현상이기도 하다. 카렌 러셀은 『잠의 기부』(2014)에서 “잠이 없는 전염병”에 대해 말하지만 이는 어쩌면 잠을 잊은 채 ‘코로나19’와 싸우고 있는 전 세계의 모든 인간의 모습에 더 잘 어울리는 말인 것 같다. 

미디어센터장 영어영문학트랙 교수 박윤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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