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만큼은

이한제

 “그러므로 타동사는 가주어와 함께…….”

책상 위 노트북에서 인터넷 강의는 끊임없이 재생되고 있다. 침대 밑으로 동전 한 개가 크게 원을 그리며 굴러간다. 설우는 주머니에서 다시 동전을 꺼내어 굴린다. 이번에는 얼마 가지 않고 중간에 힘없이 턱하고 넘어진다. 무기력한 표정으로 주머니에서 동전을 꺼내려 하지만 이제는 아무것도 없다. 이미 바닥에는 모으면 만 원 정도는 될 만큼의 동전들이 배를 깔고 누워있다. 그는 동전을 한참 바라보고는 한숨을 푹 내쉬고는 침대 위에 대 자로 눕는다. 지루함에 녹아버릴 것만 같았다. 항상 그는 생각한다. 모든 것이 일단 즐거워야 하는 것이 아닐까. 27살의 건장한 청년은 지금 심심해서 죽고 싶을 지경이다. 아침에 너무 일찍 깨어버려(그는 평소 오후 3시 즈음 되어서야 겨우 깨어나 하루 일과를 시작했다.) 옷을 갈아입고, 그동안 말로만 했던 운동을 해볼 참에 문을 나간 순간, 다시 뒤돌아 닫아버린다.

날씨가 너무 좋았다. 그에겐 정말로 빌어먹을 정도로 좋았다. 갑자기 운동 따위를 하고 싶지 않았다. 사실 하늘이 어제와 별반 다르진 않았지만, 매번 해가 저물어가는 어둑한 노을 진 하늘과 청명한 하늘은 그에겐 차이가 컸다. 이 어울리지 않는 날씨는 그에게 마치 긴 장마가 끝나고, 해가 떠오른 기분이다. 애써 갈아입은 운동복을 벗어던지며 생각한다, 오늘만큼은 즐겨야 한다고.

지금 그에겐 당장의 운동도, 밀린 자소서 준비도 중요하지 않았다. 곧 갚아야 할 카드 명세서도, 쌓인 공과금 고지서도, 월세도, 오늘의 높고 넓은 푸른 하늘에 모두 파묻혀 버렸다. 하늘의 푸른 장막 뒤 검은 바탕의 별처럼 모조리 사라져 버리고 잊혀졌다. 옷을 갈아입고 최대한 깔끔하게 방을 정리한 후 문 밖을 나선다. 버섯이 피어날 것만 같던 무기력한 모습을 떨쳐내고 싶은 듯 경쾌한 발걸음으로 옥탑방 계단을 내려간다. 가파른 경사라 매번 신경 쓰며 다녔지만 생각에 잠긴 그는 어린 아이처럼 뛰어다닌다. 듬성듬성 잡초가 솟아 있는 마당을 지나 버스 정류장으로 향한다. 오늘은 주말 아침이기에 골목은 사람이 없이 한산했다. 아무래도 그의 친구들도 분명히 집에서 할 일 없이 있을 터이니 연락만 하면 나올 것이다. 오랜만의 친구라, 같이 스터디 그룹을 하는 사람들과는 다른 느낌으로 다가왔다. 오늘 설우는 정말 놀랄만한 하루이기를 기대하고 있다. 얼마 거리가 되지 않는 버스 정류장에는 오직 버스 노선 하나만 다닌다. 긴 대기 시간에 이 동네 사람들은 조금 더 걸어 나가 사거리에 있는 정류장을 이용하곤 했다. 평소에 설우도 마찬가지로 무거운 가방을 메고 걸어 다니곤 했다. 오늘만큼은 한적한 정류장을 택했다. 정류장 의자에 앉아 하늘을 본다. 커다랗고 하얀 뭉게구름이 유화처럼 번지며 천천히 흘러간다. 프레임 밖에서 천천히 녹색의 버스 지붕이 들어온다. 그것은 시내로 데려다 줄 마차 같이 느껴졌다. 문이 열리고 한껏 차려입은 그가 올라선다. 등에 멘 가방이 없어 왠지 어색해 옷매무새를 만진다. 갑자기 퀴퀴한 냄새가 확 코를 찌른다. 무슨 일인가 싶어 자켓의 안주머니를 살펴보니 저번에 신었던 양말이 한 짝이 둘둘 말려 들어있었다. 보기 부끄러워 다시 주머니에 넣는다. 그의 깊은 곳에서부터 오늘은 퀴퀴한 냄새가 풍기기 시작했다.

 

오늘은 도희에게 결심의 날이다. 이제는 일요일 출근을 견디지 못하겠고 빌어먹을 그들의 손가락들과 입들이 자신을 훑고 다니는 것 또한 참지 않겠다고 선언 하는 날이다. 슬프게도 그 거사일이 일요일이라니 도희는 무표정한 얼굴로 내일 어떻게 출근해야 할지 고민한다. 회사에 들어가 문을 열어보니 휑한 사무실이 그녀를 반겨주었다. 출근 하는 버스 안에서 흔들리며 내내 찝찝했던 불쾌함은 예상을 빗나가지 않았다. 정말 일요일이 저주스러웠다. 전지전능한 하느님은 왜 일요일 하루를 쉬는 날로 만드셨는지.

'어차피 나 빼고는 전부 드러누워 TV를 보고 있겠지. 아니, 부장은 끝내주는 곳에서 접대 골프를 치고 있을 지도 모르고, 빌어먹을 **과장은 회사 핑계를 대고 아내 몰래 여자를 만나러 갔을 지도 몰라. **대리는…….'

그녀는 아무도 없지만 조용히 자신의 자리로 가서 컴퓨터를 켜고 가방에서 묵직한 무게의 포트폴리오를 꺼낸다. 도희는 얼떨결에 회사가 후원하고 주최하는 공모전 담당이 되어 하루에도 몇 편씩 공모전 포트폴리오를 처리해야했다. *부장은 이 행사를 두고“ 또 회사에서 귀찮은 이벤트를 벌이나 보네.” 라고 말했다. 모두가 행사 때문에 바쁘게 움직였고 *대리의 *과장의 기본 업무는 밀물이 들어오듯 천천히 그녀에게 밀려들었다. 결국 업무량은 한계에 다다르고 아주 행복한(심지어 신도 쉬었다는) 주말에 나와서 컴퓨터를 켜야 한다. 더욱 그녀를 괴롭게 하는 사실은 마감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녀가 책상을 톡톡 두드린다. 모니터에는 물고기가 헤엄쳐 다니는 화면 보호기가 켜진지 오래다. 오늘은 마감 시간 이틀 전이기도 하지만 분명 결심의 날이기도 하다. 마지막에 오점을 남기고 싶지 않았다. 도희는 정신을 가다듬고 키보드를 두드린다. 아무도 없는 사무실에서 지금 그녀는 우습게도 정시 퇴근을 노리고 있다.

설우는 버스에서 내리지 못하고 있었다. 홍대는 갈 필요가 없다. 어차피 그곳은 매일 밤이 일요일처럼 사는 곳이니까 조금 더 버스를 타고 가니 명동에 도착했다. 어차피 친구들은 답장이 없으니 무엇을 하든 상관이 없었다. 화창한 하늘만큼 어깨를 쭉 펴고 명동으로 들어간다. 사실 그는 서울 토박이이지만 서울 토박이가 오히려 63빌딩을 가보지 않은 것처럼 명동 또한 낯설다. 이곳은 신기하게도 제일 많이 들리는 말이 중국어와 일본어다. 가본적은 없지만 홍콩이나 신주쿠 거리가 이렇지 않을까 상상한다. 명동 극장을 끼고 오른쪽을 돌아 골목으로 들어가 여행객이 없고 조용한 카페를 찾았다. 호기심에 둘러보는 관광객보다는 하루를 정신없이 보내야 할 직장인들이 시계를 풀고 앉아 쉬는 곳 같다. 그들 틈에 끼어 커피를 마시려니 조금 눈치가 보여 테라스로 빠져 나왔다. 밖이었음에도 꺼진 담배의 매캐한 냄새가 올라온다. 벽 틈새에 탄환처럼 꽁초가 박혀있다. 그 자신도 덩달아 씁쓸해졌다. 자신은 아직 벽에 무엇을 쏠 자격도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젠장 빌어먹을!”

도희는 결국 일을 다해냈다. 점심도 거른 결과 6시 정시에 모든 일처리를 마쳤다. 그녀는 자랑스럽게 자신의 결과물들을 정리하고 첫 사직서를 그 위에 다소곳이 올려놓고 매우 당당한 걸음새로 퇴근했다. 무언가 자신이 영웅처럼 느껴졌다. 서울에서 제일 잘나가는, 우월한 커리어 우먼들, 그녀들도 이 같은 상황이라면 도희 자신과 똑같은 걸음걸이로 걸어 나왔을 것이라 생각했다. 아니 애초에 그녀들은 주말에 나오지 않았을 것이다. 어차피 그녀들의 위치는 군림하는 자리니까. 회사 밖으로 나온 그녀가 잠시 두리번거리다 근처 편의점으로 들어가 캔맥주 하나를 사고 나온다. 근래에 기분 좋은 날이다. 오늘만큼은!

 

설우가 다시 묻는다.

저 왜 저렇게 사람들은 바쁘게 움직이는 걸까. 손가락을 툭툭 튕기며 지그시 창밖을 쳐다본다. 살짝 내려앉은 눈꺼풀 뒤에 숨겨진 검은 눈동자에 아로 새겨지는 도시 풍경 속에서 우울함이 흘러나온다. 지나가는 사람들 머리마다 그는 천천히 훑는다. 정장의 행렬, 검은 혹은 회색의 강물에 툭 삐져나온 하얀 바위처럼 깊게 뿌리가 박혀 같이 흘러가지 못함을 슬퍼하며 자신의 몸에 검은 물만 철썩 끼얹고야 마는, 그는 바위였다. 손가락을 조금 더 세게 튕긴다. 시간이 얼른 지나 새까만 밤이 왔으면 좋겠다. 그래서 모든 걸어 다니는 우울들을 묻어 주었으면 좋겠다.

설우의 시선은 거리 풍경 너머 과거로 천천히 발길을 옮긴다.

즐겁다. 과거는 항상 웃고 있었다. 아무것도 모를 때가 가장 즐거운 법이다. 스무 살 새내기의 웃음은 언제나 기대감이 강하게 흘러나온다. 얼마 후 흙모래가 묻은 군복 위로 극복의 웃음이 묻어나고 있다. 그의 미소는 대학교 졸업 사진을 찍을 때까진 남아있었다. 그 후로 3년째 설우는 웃음을 빼앗겼다. 아니다. 그저 빼앗긴 척을 할 뿐, 얼굴 뒤로 깊게 숨긴 것뿐이다. 무직자는 웃으면 안 된다. 그는 틈틈이 불쌍하고 허탈하며 혹 멍한 눈빛으로 실소를 뱉곤 했다. 다행히도 주위에 선한 사람만 남았는지 항상 격려와 위로를 받았다. 그도 사실 즐기기 보다는 위장처럼 덮는 것이다. 2등은 격려나 위로 그리고 앞으로의 기대감을 받지만 꼴등은 깔끔히 잊히는 법이다. 설우는 아버지가 어깨를 두드리며 실수였으니 다음 기회에 더 잘할 수 있다는 말이 좋았다. 어머니가 예쁘게 깎은 사과를 접시에 담아 내어오며 조금 쉬었다가 하라는 말이, 그날 컨디션이 안 좋아 그랬을 것이라는 말이 좋았다. 그때엔 그도 노력했다. 애써 슬픔을 연기할 필요도 없었다. 계속된 불합격만이 그가 가진 모든 것을 파내고, 걷어내고 밝혀냈다. 그는 발가벗겨진 사람 마냥 도망치듯 집을 나와 자취방으로 숨어들었다. 그의 현재 직업은 편의점 저녁 아르바이트이다.

카페에 사람이 많아 졌다. 그는 잔뜩 움츠린 채 명동의 인파 속으로 사라진다.

 

도희는 맥주 한 캔을 들고 청계천 주위를 걷고 있었다. 다 끝낸 기분이었지만 해방의 기쁨 뒤로 막막한 기분이 올라온다. 도돌이표를 찍고 돌아온 기분이 들었다. 취업준비생일적의 초조함과 불안감은 덜 하더라도 무국적자처럼 받아줄 곳을 찾아 돌아 다녀야하는 그 고됨이 그녀를 막막하게 만든다. 잠깐의 떨림이 몸을 타고 흐른다. 하지만 지금의 이 회사를 견딜 수가 없다. 덕분에 이십 대 중반인 그녀의 손톱은 물려 뜯어져 이젠 뭐든지 베어버릴 만큼 톱날 같아지고 입술은 항상 딱지가 져있었다. 지금도 손톱을 물어뜯으며 어머니께 전화를 해야 할까 핸드폰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방황하던 설우가 메시지를 보낸다.

방황하는 도희의 핸드폰이 울린다.

 

‘오늘 저번에 말해줬던 네 회사 근처인데 생각나서 연락해본다. 회사는 잘 다니니? 연락 좀 하고 살자. 일요일 푹 쉬어라.’

도희는 바로 답장을 보낸다.

‘오, 나도 지금 회사 근처인데 어디야? 한번 보자.’

어머니께 연락하는 것은 조금 미루기로 하고 일단은 누구라도 만나서 미칠 듯이 솟아오르는 감정을 풀어내고 싶었다.

‘인사동에서 보자, 저번에 마셨던 카페에서.’

 

설우의 이어폰에선 오케스트라가 연주하고 있었다. 바이올린 현의 긴장감이 활을 타고 달려나간다. 묵직한 베이스는 뒤를 받쳐주고 뒤이어 호른이 터져 나온다. Mazeppa는 그런 곡이다. 다양한 노래 중에 그는 Liszt-wagner 오케스트라가 제일 좋았다. 악기들이 하이라이트를 지나 고조를 위해 소리를 낮추며 긴장을 이완할 즈음에 신기하고도 재미난 일이 생긴다.

‘콜록’

어이없는 기침 소리가 그대로 녹음된 것이다. 아무래도 공연 실황을 녹음한 터라 간간히 청중들의 목소리가 들린다. 그렇다고 하여 모든 관객의 입을 막아놓을 수도 없다. 어찌 되었던 참다 터져 나온 기침 소리는 이리저리 맴돌다 절도 있게 정렬한 음 사이로 비집고 들어와 몇 년이 지난 지금도 남아 수백 번이고 귀에서 울린다. 설우는 이 해프닝이 정말로 좋았다. 분명 어디에서도 환영 받지 못했으리라. 그리고 편집자에게 웃기면서 동시에 애매모한 고민을 안겨주었을 것이다. 설우는 이 해프닝이 대단히 유쾌했다. 막상 이 소리는 기침한 사람도 기억 못할 만큼 시간이 흘러도 남고 말 것이다. 스무 살의 설우는 이 기침이 되고 싶었다. 그렇지만 지금은 그저 공연장 밖에서 희미하게 들리는 음악을 들으며 서 있는, 지각한 관객일 뿐이다.

 

인사동은 이제 프랜차이즈 속에서 전통을 파는 거리가 되었다. 설우는 이 거리를 가장 좋아했기에 변모한 모습에 화가 나기도 했다. 그가 가는 카페는 온통 담쟁이 넝쿨로 뒤덮여 있고 원래 가정집을 개조한 곳이어서 언뜻 보면 폐가 같이 보였다. 카페에서 만난 두 친구들은 원목 탁자를 두고 과거 이야기를 천천히 풀어낸다. 하지만 이야기 하는 내내 설우는 도희의 사원증을 바라본다. 도희의 두 볼은 이미 발갛게 달아 올라있다.

“술 마셨네. 회식하고 온 거야?”

그녀는 무슨 일요일에 회식이냐며 고개를 저었다. 잠시 멈칫하더니 목소리에 설움을 가득 담아 말을 꺼낸다.

“그거 알아? 나, 기껏 다닌 회사가 블랙 회사인거야. 한 명씩 사라지는 동기들 보면서 어떡해, 어떡하지 하면서 다니다가, 이젠 아무것도 못하겠어. 이상하게 나는 자르지 않더라. 충직한 노예 하나는 필요했던 거지. 그래도 난 살았다고, 참고 또 참다가......”

뜸을 들이고 식어버린 커피를 한 모금 마신다.

“그냥 내가, 내 모든 꿈이 몰수당한 기분이야.”

설우도 블랙 회사는 무엇인지 알고 있다. 듣기로는 자르기 전까지 일만 시키고 재계약 전에 온갖 사유를 들어 해고시켜 버리고, 제대로 월급을 주지 않는다고도 했다. 그래서 컴컴한 사막과 같이 그저 일 속에서 헤매다 죽어버리는 것, 모든 빛깔의 무덤처럼 블랙.

“미안. 오랜만인데. 내가 요즘 너무 우울했거든.”

그녀가 가방에서 자그마한 약통을 꺼낸다.

“이젠 수면 유도제를 먹지 않으면 잠도 못 자.”

설우는 약을 바라본다.

“괜찮아. 오늘 책상에 사직서 던져두고 왔거든. 당분간 핸드폰은 꺼놔야겠지. 그러면 좀 놔주지 않을까? 아, 맞다, 이것도 벗어버려야지.”

도희가 사원증을 벗어 탁자 위에 놓는다. 설우는 사원증을 들고 자세히 살펴본다. 아직 한 번도 가져보지 못한, 받고 싶은 선물처럼 천천히 뚫어지게 본다. 사원증 사진 속 도희는 웃고 있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간 기분이야.”

도희가 다시 말을 꺼내자 그는 습관적으로 보고 있던 사원증을 주머니에 넣었다.

“그래도 이직은 사정이 조금 낫지 않아?”

“그런가.”

커피를 마시며 도희는 설우의 눈치를 본다. 그녀도 친구들에게 그의 사정은 들었기 때문이다. 갑자기 방금 전 모습이 부끄러워졌다. 아니면 그에게 자신이 다니는 블랙 회사 같은 곳은 피하라 조언을 했어야 했나.

“요즘 너 연애는 하냐? 생긴 게 조금 되니까 곧 잘 연애 했었잖아.”

“무슨 편의점 야간 알바가 연애냐. 누가 좋아하겠어.”

도희는 아냐 그래도 하며 말꼬리를 흐린다. 시간이 흘러 창밖으론 어둠이 내려앉았다. 설우가 좋아하는 밤이다. 모든 것을 감추는 시간이기에 그의 열등감도 슬그머니 들어갔다. 그래서 조금 더 용기를 내기로 했다.

“그, 우리 동기 중안이 기억나? 걔 얼마 전에 장가갔어.”

“정말? 난 청첩장도 못 받았는데!”

도희도 침묵이 부담스러웠는지 화색을 띄며 받아주었다. 그들은 그렇게 서로 과거 취해야 했다. 서로 아픔을 터뜨리는 뇌관을 건드리고 싶지 않았다.

 

11시가 되자, 신림동 근처 작은 편의점에 설우가 들어왔다. 앞 시간의 아르바이트생이 늦었다며 짜증을 부렸다. 설우는 미안해하며 커피 한 잔을 꺼내와 건네주었다.

“다음부터는 늦지 말아 주세요. 오빠, 안 그래도 알바 때문에 토익 스터디도 10시에 겨우 잡은 건데……”

설우는 거듭 사과한다. 그리고는 작은 사이즈의 앞치마를 두른다. 설우의 키가 큰 편이어서 우스꽝스러운 모습이다. 그는 갈아입던 도중 주머니에서 사원증을 꺼낸다. 돌려주려 했지만 도희는 손을 내저었다.

‘괜찮아, 괜찮을 거야. 오늘만큼은.’

편의점 냉동고 소리가 울린다. 그가 천천히 사원증을 목에 걸어본다. 지금도 사원증의 사진은 미소 짓고 있다. 설우도 눈치를 보고는 따라 미소 짓는다.

‘나도, 오늘만큼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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