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7회] 수필 부문 당선

배재신문l등록2022.09.14 10:22l승인2022.09.14 1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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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을 무너뜨리는 여자

국어국문학과4 황지선

 

너는 모래성 같아. 위태로운 말다툼의 결말이었다. 애써 쌓아놓으면 너무 쉽게 무너져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말은 의미를 가졌다가 이내 뜻 모를 자음과 모음으로 변했다. 처음 귀로 들어온 말은 아니었다. 몇 번 그런 말을 들었다. 그다음은 뭐였지? 가족을 너무 예민하게 받아들인다고 말했었나? 그건 내가 갖고 있는 가장 큰 약점이었다. 그래서 그런 말을 들었을 때 내가 겪고 있는 일임에도 유치한 삼류 소설의 결말처럼 쉽사리 와 닿지 않았다. 우린 너무 다른 사람이라는 말로 포장하기에는 상처의 깊이가 꽤 깊었다. 늘 그렇듯 치부를 건드린 사람은 입이 없다. 나는 언젠가 입술이 존재했을 그 밋밋한 공간을 뚫어져라 바라보며 상대의 생각을 추측할 뿐이다.

무작정 비행기 표를 결제했다. 함께 여행을 가자고 마음먹을 땐 그렇게 힘들더니 정작 도망이라는 이름으로는 5분도 되지 않아 도쿄행 표가 들려졌다. 기억에 없는 하루들을 넘기며 가는 당일에도 설렘과는 거리가 멀었던 마음은 비행기에 오르고서도 마찬가지였다. 오래전 꺼둔 핸드폰이 고요했다. 그러나 전원을 켠들 달라지는 것이 없을 터였다. 나를 발견해줘, 새까맣고 차가운 기계를 쓰다듬다 이내 가방 안에 넣어두었다. 눈가가 역도를 든 선수의 손처럼 파르르 떨렸다. 새벽 세시에는 일어나 출발해야 한다는 부담으로 전날 잠자리에 들지 못해 몸이 무거웠다. 그런데도 잠이 오지 않았다. 마른기침이 나고 꽉 막힌 듯 목이 아파왔다. 도망친 곳에 아무것도 없을까 겁이 났다. 나 지금 도망치는 거야, 듣는 이 없는 내 다짐이 허공에서 머뭇거렸다.

도착한 땅은 낯설면서도 어딘가 친근해서 숙소에 짐을 두고 나서는 따듯한 숨이 쉬어졌다. 나를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내가 얼마나 엉망인 마음을 가지고 여기로 왔는지 궁금해하지 않았다. 눈을 마주치는 사람이 없었다. 그제야 조금 들떴고, 또 안심했다. 일본에서 가장 처음으로 한 일은 우습게도 밥을 먹는 것이었다. 남들은 힘들면 밥 생각이 없다는 데 나는 오히려 강한 허기를 느꼈다. 손이 저릿했다. 시선이 닿은 손끝이 탁했다. 갈색으로 바짝 말라 있었다. 속이 비어있다는 것을 들키면 쉽게 바스러질 게 분명했다. 밥을 먹고는 꼬박 하루를 채웠다. 일본에서의 밤을, 그리고 아침을 맞이할 때마다 창밖 풍경이 변하는 걸 보았다. 커튼 너머로 어른거리는 빛을 마시며 허기를 채웠다.

돌아가기 하루 전날 내 어깨를 간질이는 지문이 느껴졌다. 함께 사진을 찍고 싶다고 했다. 내 어눌한 일본어와 그 사람의 서툰 영어. 함께 신사로 가는 길을 걸으며 아이스크림을 사고 운세를 뽑았다. 여기가 사진이 예쁘게 나온다며 몇 번이고 내 핸드폰을 들어 사진을 찍어주었다. 그냥도 아니고 아주야, 정말 예뻐. 아니라며 어정쩡하게 웃는 나한테 몇 번이고 그렇게 말해주었다. 메일 주소를 교환하고 돌아가는 길, 사진 하나를 선물 받았다. 멀리서 도쿄타워를 찍은 사진. 도쿄타워를 가보지 못한 내게 주는 선물이라고 했다. 이렇게 예쁜 타워를 보지 못했으니 또 일본에 온 이유가 생겼지? 능청스럽게 웃는 미소에 고맙다고 답하고 처음부터 들고 있던 노트에 한글로 글을 썼다. ‘예쁜 일본을 만나게 해줘서 고마워.’ 도망친 낯선 곳에서 얻은 소중한 경험이었다. 사람에게 상처받아 간 나라에서도 사람 덕분에 도망을 마칠 수 있게 된 것이다. 마지막 날 찍힌 사진 속의 나는 도망친 사람의 얼굴이 아닌 내내 치유 받길 바란 아이의 얼굴로 남아있었다.

여행의 끝. 도망이 아닌 여행이었다, 슬쩍 이야기할 수 있는 시간. 돌아오는 비행기에선 감은 적 없는 눈이 떠졌고 꿈에서 깨어난 것처럼 정신이 아득했다. 곧바로 잠들고 싶은 꿈이었다. 전원을 켠 핸드폰에는 나를 찾는 사람들이 있었다. 종일 막혀있어 칼칼했던 목이 어느새 가벼웠다. 사람들을 만나면 힘들었다며 조금쯤 어리광을 부려도 괜찮을 거다. 집으로 돌아와 짐을 정리하고는 비어있던 액자 속에 도쿄타워 사진을 끼워 넣었다. 사진을 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풍요로웠다. 그러나 할 일이 하나 더 남아있었다. 가장 중요한 일이었다. 책상에 앉아 사 왔던 엽서 중 가장 예쁜 것을 골라 나를 높게 쌓으려던 사람에게 절대로 전해주지 않을 편지를 썼다. 목이 답답했던 이유를 증명하듯, 목 끝까지 차올라 뱉어내지 않고서는 못 배길 말. 숭고한 행위를 앞둔 것처럼 펜을 고르고 책상을 정리했다. 먼지 하나라도 붙을까 몇 번이고 엽서를 쓸면서.

고맙지만 나는 모래로도 괜찮아. 여기 가장 낮지만 따듯한 땅 위에서 숨 쉬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손을 움직였다. 가만가만 파도 소리를 들으며 고요한 것이 진정으로 좋다고 입술을 여는 대신 한 글자마다 힘을 실었다. 너는 나를 쌓아 성을 만들고 싶었겠지만 그걸 원하지 않는다고. 그래, 나는 바란 적 없다. 생기 없는 땅 저기 어딘가 마음 놓고 무너지지 못한 내가 있다. 형태를 채 갖추지 못하고도 애써 성인 척하는 안쓰러운 모습이 있다. 답답하게 뭉쳐있던 것들을 발로 툭, 찬다. 부슬거리며 무너지는 것이 비로소 안정적이다. 사학년의 가을이 여물어 간다. 짙게 변했던 게 이제야 알알이 빛을 머금고 반짝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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