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지개 단풍

상담심리학과 석사 1학기 손영숙

올 여름은 내 생애 가장 더운 날이었다. 절대 물러가지 않을 것만 같았던 길고 길었던 무더위도 자연의 섭리를 거슬리기엔 자신이 없었던가? 오색의 단풍과 고개 숙인 곡식들을 가득 품은 가을에게 밀려 도망갔나 보다. 어느새 아침, 저녁 쌀쌀한 한기가 내 몸을 감싼다. 가을 산의 단풍은 붉게 물들었겠지? 오랜만에 보문산 사정공원에 올라 자연경치를 구경해본다. 가을산은 서서히 물들고 있었다. 노란은행잎을 부러워하여 샛노란 이파리를, 여름내 활활 타오르던 태양을 그리워하며 새빨간 이파리를, 여름의 푸름을 간직하고파 아직도 푸른 이파리를 품은 나무들이 자태를 뽐내고 있다. 마치 자신을 봐 달라고 손짓한다. 손짓에 이끌려 나무 아래로 다가가 셔터를 누르며 추억에 잠겨본다.

수년전 소속된 단체에서 부여 부소산성으로 문화재 탐방을 떠났다. 백제의 마지막을 함께한 삼천궁녀의 넋이라도 만나랴? 우리의 목적지는 낙화암이었다. 초행길이고 산을 잘 타지 못하는 탓에 뒤로 처져 앞의 그룹을 정신없이 따라간다. 그리 험난한 코스는 아니지만, 주변을 둘러 볼 여유가 없다. 마침내 목적지인 낙화암에 올라 수 천 년을 유유히 흐르는 백마강을 바라본다. 600여년의 역사를 간직했던 찬란한 백제의 문을 닫아야했던 의자왕. 망국의 한을 감추지 못한 궁녀들이 흐르는 강물에 몸을 던져야 했던 현장을 돌아 하산한다. 발걸음이 오를 때 보다는 가볍다. 조금의 여유도 생겼다.

한참을 내려오는데 몇 십 년, 아니 몇 백 년은 되어 보이는 거대한 나무 한그루가 우리의 앞길을 막는다. 빨강, 자주, 주황, 노랑, 연두, 초록, 갈색 등 그 옛날 왕궁에서 입었을 법한, 형형색색의 옷을 입은 나무다. 1,350여 년 전 백제의 마지막을 함께 하며, 찬란한 백제의 역사를 기리는 원혼들의 빛이리라. 비록 일곱 가지 무지개 색깔은 다 갖추지 못했지만, 그 아름다움으로 인해 ‘무지개 단풍’이라 명명해 본다.

“와~~~, 저 나무 좀 봐. 정말 예쁘다”

“정말 멋지다. 왜 아까 올라갈 때는 못 봤지?”

“한 나무에 저리도 많은 빛깔을 담고 있을까? 나는 저런 단풍나무는 처음 봐요”

너도 나도 나무의 아름다움을 칭송할 따름이다. 그리도 아름다운 나무가 왜 올라갈 때는 보이지 않았을까? 나무를 한 바퀴 돌며 사진을 찍어본다. 올라가는 쪽은 그늘이 있어 아직도 한여름의 푸름을 간직하고 있고, 내려오는 쪽은 햇빛을 받아 여러 번 염색한 머리처럼 층을 이루며 서로 다른 색깔을 뽐내고 있다. 한 뿌리에서 나온 한줄기에 붙은 가지와 잎들이지만 그들은 너무도 다른 모습을 하고 있다.

이 나무는 수많은 시간을 거슬러, 그 자리에 그대로 있었건만 사람들은 각자의 위치에서 나무를 바라본다. 산을 오를 때의 나, 산을 내려올 때의 나의 입장으로 나무를 바라본다. 나의 시각에 따라 나무의 모습이 내 눈에서 사라지고, 다시 내 눈에 보이는 것이 아닌가? 산을 올라야 하고, 앞의 무리와 떨어지지 않기 위해 열심히 걸어야 했던 나에게 그 거목은 시야 밖의 것이었다. 마음의 여유가 생겼을 때 비로소 나무는 나를 반겨준다.

나무가 아닌 나의 모습을 돌아본다. 주위를 살필 여유가 없다. 예술치료, 음악에 이어 상담심리 공부를 하고 있는 나, 오로지 목표를 향해 뒤를 돌아볼 여유 없이 5년째 공부를 하고 있다. 예술치료사가 되겠다고 시작한 대학원공부, 2년이라는 시간은 기쁨이었고, 희망이었다. 2년 과정을 마치고 치료사의 일을 하려고 했지만, 현실은 암담하다. 사상누각이랄까? 음악과 상담에 대한 기본기는 부족한데 치료기법만 배워서 일을 하다 보니, 스스로 바닥이 보이는 듯하다. 내담자에 대한 죄책감이 짓누른다. 보호자 상담에도 한계가 느껴진다. 다시 시작한 음악공부 - 2년의 과정으로 채우기는 했지만, 아직도 멀기만 한 치료사. 다시 시작한 심리상담 공부 이렇게 나는 5년째 공부를 계속하고 있다. 정신없이 달려왔던 지난 5년, 앞만 보고, 목적지만 향해 달려왔다. 주변의 아무것도 바라볼 수가 없다. 상담공부를 하며 나 자신을 돌아보니 이제야 가족이 눈에 들어온다. 남편과 삼남매는 아내와 엄마가 자신을 돌봐달라고 아우성치고 있다. 그럼에도 그들을 보지 못했다. 고목이 햇빛을 많이 받는 환경과 그렇지 않은 환경에서 서로 다른 색깔로 사람을 유혹하듯이, 자녀들은 벌써 각자의 위치에서 자신의 빛깔로 성장하고 있었다. 군복무중인 큰아들, 내년이면 고3, 고1이 되는 딸과 아들, 엄마의 손이 필요했던 시기에 엄마의 공부는 아이들에게 어떤 햇빛과 바람이었을까?

한 뱃속에서 나왔지만 아이들이 너무도 다르다. 커다란 고목의 단풍색깔처럼 말이다. 엄마는 언제나 그 자리에서 똑같은 방식으로 양육하고자 했다. 받아들일 수 있는 나이가 다르고, 성격이 다르다는 걸 이해하려 하지 않았다. 나이에 따른 환경이 다르다는 걸 간과한 것이다.

첫 아이는 아직도 푸름을 간직한 초록나뭇잎이다. 엄마 말씀에 “NO”라고 대답하지 않는다. 나중에 후회할지언정 부딪치기를 원치 않는다. 뜨거운 햇빛과 시원한 바람을 제대로 받아보지 못하면서도 광합성 작용으로 나무의 생기를 전해주는 아직도 푸른 잎처럼, 엄마에게는 사랑스럽고 천사 같은 아들이다. 사회와 다른 세상 군복무를 하면서 아들은 변하고 있으리라. 아직은 푸른 잎을 띠고 있지만, 제대할 때면 든든한 남자의 모습으로, 초록이 아닌 다른 어떤 모습으로 변할지 궁금하다.

그 반면 둘째는 빨강, 주황, 노랑, 초록 어떤 잎이든지 갈아입을 수 있는 변덕쟁이다. 하고 싶은 것도 많고, 자신의 주장을 잘 하는 편이다. 필요한 것이 있으면 협상을 요구한다. “내가 이렇게 하고 싶은데, 다른 것을 하면 할 수 있게 해 주세요.”라고 한다. 딸이라는 이유로 편파적인 사랑이 있었나보다. 아니, 둘째만의 특성인 사랑을 받기 위해 더 많은 노력을 한 것이다. 많은 햇빛을 받고 빨갛게, 노랗게 좀 더 빨리 옷을 갈아입는 단풍잎처럼.

막내는 아직 자신의 색깔을 내지 못하고 있다. 자신의 꿈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한참 엄마의 관심을 받아야 할 초등고학년 시절부터 엄마의 공부는 막내에게 희망적인 영향을 주지 못한 것 같다. 햇빛보다는 바람을 더 많이 받았나보다. 붉음도 푸름도 아닌 다른 색깔을 내고 있는 단풍잎처럼 막내는 지금도 자기만의 색깔을 만들어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태양이 사시사철 늘 한결같이, 뜨거운 햇빛을 내어준다. 나무는 자신의 가지를 뻗어 따스한 햇볕과 함께, 시원한 바람을 감싸 안으며 성장하고 자신의 모습을 바꿨으리라. 어린 나무에서 거목이 되기까지 수많은 인내의 고통을 참았으리라. 인생의 한 복판에서 거목처럼 버티고 싶었지만, 수많은 가지에서 각자의 색깔을 뽐내고 있는 나뭇잎은 거목의 마음을 알아줄까? 거목은 모든 줄기와 가지, 잎까지 사랑했으리라. 뿌리는 줄기, 가지를 거쳐 모든 잎까지 영양분이 전달되도록 모든 힘을 다해 땅의 영양분을 빨았을 것이고, 광합성 작용을 하며 구석구석 영양분을 전달했을 것이다. 하지만 잎은 뜨거운 태양의 열기를 먼저 받기 위해 손을 흔들고, 물을 뿜어냈으리라.

우리 아이들이 거목과 같은 부모의 마음을 알아줄까? 뱃속에 잉태하면서부터 그 자리에서 사랑으로 기도로 건강하고, 당당하게 살아가기를 바랐던 부모의 마음을……. 내 자식 잘되기를 바라며, 내 품에만 안겨있기를 바랐던 자녀들이 이제는 너무 커 버렸다. 나의 길을 가고는 있었지만, 자녀에 대한 나의 사랑은 늘 한결 같은 줄 알았다. 이제야 돌아보니 아이들은 각자 자신의 색깔을 내며 엄마 품을 떠나려고 한다. 단풍이 산을 덮으면, 나뭇잎들은 낙엽이 되어 나무의 곁을 떠날 것이다. 이제 나도 삼남매의 굴레에서 벗어날 때가 된 것 같다. 나무가 제 자리에서 뿌리의 양분을 줄기를 통해 잎으로 보낼 때 그 많은 잎이 자신을 떠날 것이라 생각했을까? 나무도 많은 잎으로 인해 봄과 여름, 가을을 행복하게 지냈으리라. 내년을 기약하며 그 많던 색색의 이파리를 떠나보내리라. 자신의 색깔을 낼 줄 아는 아이로 성장하는 모습을 본다. 내 자리에서 사랑을 전하며 자녀로부터 받은 기쁨과 행복을 추억하며, 다음 세대를 위해 자녀를 내어놓으리라.

지금 쯤 부소산 어딘가에 있던 그 나무는 어떤 모습일까? 각자의 색깔로 자신을 표현하는 나뭇잎을 보며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