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7회] 소설 부문 입선

배재신문l등록2022.09.14 10:35l승인2022.09.14 10: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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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녀와 소년, 그리고 체스

영어영문학과1 전수현  

 

어린 소녀가 처음으로 눈을 떴을 때 가장 먼저 생각나는 건 ‘눈밭’이였다. 너무나도 하얀 방은 눈으로 덮인 설산을 연상시켰고 설산을 연상시킬 정도로 하얀 방 덕일까, 손발이 조금 차가운 것 같기도 했다. 아무튼 자신은 그 알 수 없는 공간의 어느 의자에 앉아 있었고, 눈 앞에는 하얀 테이블보가 깔려진 긴 책상이 있었고 그 건너에는 자신 또래의 소년이 앉아 있었다.

 

“어서와.”

 

소년은 싱긋 웃으며 소녀에게 인사했다. 검은 머리카락에 부드러운 인상을 보여주는 소년은 마치, 유치원생이 친구에게 인사하듯이 손을 흔들어보였다. 실제로 그는 유치원생처럼 보였고. 먼 그의 인사를 받은 소녀는 애써 그가 누군지 알기 위해 자신의 머릿속을 돌렸으나 이내 고개를 저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가 누군지 생각나지 않았다.

 

“누구세요?”

“이런 내가 생각나지 않는 거야? 속상한걸.”

 

소년의 말에 소녀는 그가 거짓말을 했다고 생각했다. 그래도 그가 누군지 대충은 알 것 같았다. 아무래도 상황이 상황이다 보니까.

그렇게 생각을 마무리 한 소녀는 자신의 앞에 놓인 체스판을 바라보았다. 자신의 쪽에는 검은 말들이 세워져 있었다. 가만히 익숙하지 않은 작은 손을 움직여 소녀는 검은 폰을 두 칸 움직였다. 소녀는 체스에 대해 잘 알진 못했지만 일단 다른 체스 말들 중에서 가장 무난한 말을 움직인 소녀는 손을 말에서 떼었고 그녀의 손이 떨어지자 천천히 판은 소년의 쪽으로 움직였다. 멀어져가는 체스판을 보며 소녀는 천천히 입을 떼었다.

 

“유치원 졸업식 날, 친구와 선생님과 약속했었어요.”

 

소녀가 말을 떼었을 때, 판은 중간 즈음을 지나고 있었다.

 

“어떤 약속을 했는데?”

“초등학교 가서도 매일 놀러오겠다는 약속이요. 하지만 지키지 못했어요. 그야말로 작심삼일이었죠.”

 

피식 소녀가 웃자 소년도 함께 미소 지었다.

 

“하지만 힘들어했잖아? 가고 싶은데도 가지 못해서.”

“물론이죠. 아, 후엔 거의 잊어버렸지만.”

“저런.”

 

소녀의 말에 키득거리며 웃은 소년은 손을 움직여 하얀 말을 움직였고 그러자 체스판은 다시 소녀의 쪽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소년이 먼저 입을 열었다.

 

“졸업식 전에는 친구와 싸웠었지.”

 

유치원생 같았던 소년이 초등학교 무렵의 소년의 모습으로 미소지어보였다. 마치 이전의 추억을 되돌리듯. 부드러운 천 소리를 내며 움직이던 체스판은 곧 소년과 비슷한 동년배의 소녀의 앞에 도착했다. 소녀는 살짝 웃으며 체스판을 내려다보았다.

 

“그래요. 좋아하는 연예인 사진을 훔쳐갔으니까. 하지만 전 그 아이를 용서했어요. 사진은 사진일 뿐이니까.”

 

나름 대견한 말과 동시에 ‘탁’ 말이 놓이는 소리가 들리자 소년은 만족스러운 대답을 들었다는 듯이 미소지었다.

 

“훌륭해.”

“알고 있어요.”

 

꽤나 건방진 대답 이였음에도 불구하고 소년은 여전히 부드러운 미소를 지은 채 자신에게 넘어올 체스판을 기다렸다.

 

“아, 그러고 보니 중학생 때는 조금 막나갔던 것 같기도 하네요.”

 

움직이는 체스판을 가만히 바라보던 소녀가 생각났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어느새 어린 티는 벗어버리고 중학교 교복을 입은 소녀는 헛웃음을 지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부모님도 참 고생 많이 하셨네..”

“너도 알고 있었잖아? 무의식 중에.”

“알아요. 참나, 아는 말 좀 그만할 수 없어요? 창피하게.”

 

소녀가 불만스럽다는 듯이 투덜거리자 소녀와 비슷한 교복을 입은 소년은 키득거리며 웃었다.

 

“싫은데?”

“정말, 나이 좀 먹었다고 그러기예요? 유치하게!”

 

소녀의 항변에 소년은 눈을 토끼처럼 크게 떴다가 이내 푸하하, 하고 웃어버렸다. 그리고 다시 체스판이 넘어오고 어느새 고등학생이 된 소년은 체스판을 지긋이 바라보았다.

 

“체스, 처음 아니였어?”

“처음이예요.”

“그런데 잘하네?”

“딱히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

“후후.”

 

황당하단 듯이 어깨를 으쓱이며 말하는 소녀에 소년은 그저 가만히 눈웃음을 지으며 다시 말을 움직였다. ‘딱’하는 소리와 함께 말이 놓여졌고, 다시 체스판은 소녀의 쪽으로 움직였다. 움직이는 체스판을 물끄러미 보던 소년은 건너에 앉은, 이제는 고등학생이 되어버린 소녀를 향해 처음으로 약간은 슬픈 듯 미소지었다.

 

“미안해.”

“뭐가 미안한데요?”

“그냥 다.”

“치, 알면 됬어요.”

 

소녀는 새침하게 고개를 돌렸다. 그런 그녀의 모습에도 소년은 안타깝다는 듯이 입을 열었다.

 

“하지만 어쩔 수 없었어.”

“그쪽이 좋아하는 기적이라도 일어났으면 좋았을 텐데요.”

 

시큰둥하니 내뱉는 소녀의 말에도 소년은 그저 미소 지을 뿐이었다. 그의 미소에 이제는 포기한 듯 한숨을 푹 내쉰 소녀의 앞에 이제는 검은 킹만이 남은 체스 판이 도달했다. 가만히 체스판을 바라보던 소녀는 다시 소년을 바라보곤 두 손을 들어보였다.

 

“마지막이네요. 그쪽이 체크 메이트네요.”

“응.”

“내가 졌으니 질문 몇 개 좀 하죠.”

 

소녀의 당당한 제안에 소년은 헛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보통 이긴 사람이 하지 않나?”

“에이, 뭐 어때요. 어차피 나 말고도 여러 명 이겼을 것 아녜요.”

“.......”

 

소녀의 말에 소년은 입을 다물었다. 그런 그의 모습에 소녀는 피식 웃으며 팔짱을 꼈다.

 

“어디보자... 한솔이도 들렸나요?”

“응.”

“재현이는요?”

“그 아이도 들렸어.”

“그럼 수진이는요? 앞의 둘은 그렇다 쳐도 걔는 좀 살아야 되는데. 워낙에 착하고 공부를 잘해서 이 나라의 기둥이 될 거예요. 꿈이 판사니까, 이 분명히 나라에 도움도 되겠죠. 정의롭고 똑똑하니까.”

 

소녀의 말을 가만히 듣고 있던 소년은 고개를 천천히 저었다.

 

“그 아인 오지 않았어.”

“음! 당연히 그래야죠. 누가 살렸는데. 아, 참고로 제가 걔한테 조끼 넘겼어요. 저 완전 착하죠?”

 

장난스럽게 키득거리는 소녀의 옆에 문이 생기자 소녀는 가만히 그 문을 바라보았다. 마치 무언가를 회상하는 듯 하던 소녀는 그 상태로 다시 닫혀있던 입을 열었다.

 

“우리 부모님은 어쩌죠.”

“그건...”

“분명히 슬퍼하실 텐데.”

“그건 정말로 미안해.”

“그것만 미안한 거예요?”

“으음... 아니..”

“풉, 뭐야, 그게.”

 

고개를 푹 숙이고는 큭큭거리며 웃던 소녀는 약간 촉촉해진 눈가를 스윽 지우고는 아무렇지 않게 일어났다. 마치 당연하단 듯이. 문으로 다가가던 소녀는 발걸음을 멈추고는 소년을 바라보았다.

 

“저기요.”

“응?”

“내가 이번에는 이렇게 끝내지만, 다음번에는 반드시 이길 테니까 두고 봐요!”

“하하, 기대할게.”

 

소녀의 대담한 발언에 소년은 키득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 아니 사실 많이 차가운 자신의 손과 대비되는 따뜻한 문손잡이를 잡은 소녀는 무언가가 떠올린 듯 다시 소년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

“조금 짧았지만... 후회도 조금 들긴 하지만...”

“.....”

”뭐, 나쁘진 않았어요!“

 

소년에게 화사한 미소를 보인 소녀는 문을 열고 그 안으로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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