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3회] 시 부문 당선

'발걸음' 외 2편 배재신문l등록2022.11.16 17:18l승인2022.11.16 17: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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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걸음

이루오

걷는다는 건 앞으로 가는 게 아니라 제자리를 지키는 일

자전하는 시간 위에서 중심을 잡는다

옮겨지는 건 발걸음이 아니라 초침과 지면

자꾸만 돌아오는 아침을 걷는다

아버지는 발도장을 찍으면서 시간을 견디기로 계약했다

황동판에는 아버지의 첫 서명이 굳어있다

자꾸만 내딛는 발걸음

발바닥에 감당하지 못한 속도가 단단히 밀려있다

굳은 죽음을 딛고 걷는다

과열되는 신발 속에서는

뜨거운 노력이 발효되고 있다

아버지 발에 잘 익은 악취가 스며든다

발바닥을 긁으며 간지러운 부식을 견딘다

 

자꾸만 걸려오는 독촉이 아버지의 발을 걸어오면

그래도 일어나기 위해 넘어지는 거라고, 다시 아침이 오는 것처럼 태연하게 일어나면 된다고

노을처럼 붉은 무릎을 만지신다

멍처럼 검은 밤이 와도

아침이 초침처럼 바쁘게 쫒아온다

다시 발걸음을 내딛는다

 

이루오

 

우리는 배우면서 망각한다

피부가 여름을 학습하고 있다

팔뚝에는 폭염이 흉터처럼 기록된다

여름을 배우면서 지나온 계절을 망각한다

 

엄마의 따듯한 인사를 뜨거운 짜증으로 지나친다

 

소나기는 잊지 않으려고 오는 것이다.

빗줄기가 점자처럼 세상을 읽고 있다.

(점자는 보지 못하기 때문에 문장을 더 소중히 읽는 방식이다.)

나무가 학습한 시간의 흉터들, 땅이 학습한 발의 기록들을

천천히 더듬고 있었다.

 

구름이 걷히고 비는 자신이 읽은 세계를 웅덩이에 기록해두었다.

뒤집힌 세계였다.

망각했던 하늘이 깊게 비치고 있었다.

건물들은 뿌리처럼 자라고 있었다.

볼 수 있어서 읽지 않은 기억들이 있었다.

내가 사랑했던 마음들도 웅덩이에 자라고 있었다.

알고 있다고 생각해서 잊은 시간이 비쳤다.

 

우리는 각자의 방법으로 세계를 지나치거나 발견했다.

젖은 신발들에는 지워진 문장들이 묻어있었다.

 

손가락

이루오

 

손가락을 똑똑 꺾는 습관

그 습관엔 분절된 호칭과 지칭이 있다.

고요한 말들이 모여있는 주먹,

음절없는 측은함과 부끄러움이 있었다.

 

손가락의 춤

당신과 나 사이엔

눈으로 읽는 말이 있다.

 

답답한 속을 뚫어내는 손가락의 말

입 없는 말들이 귀를 피해 그렁그렁 한 눈에 담긴다.

망설인 말들이 볼을 따라 흐른다.

나는 자꾸만 바지에 쉼표를 찍고, 하지 못한 말을 꼭 쥐고 있다.

 

두 손에는 모든 표현 문자들이 가득하다.

두 손은 그래서 두꺼운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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