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3회] 소설 부문 가작

배재신문l등록2022.11.16 17:29l승인2022.11.16 17: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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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란

유수정

 

이 사실에 대해 오직 한 사람만은 알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한서윤은 적어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현실은 놀랍게도 그렇지 않았다.

 

딱히 모날 것 없는 가정에서 자란 서윤은 큰 주관 없이 삶을 살아왔다. 특별하게 좋아하는 것도, 잘하는 것도 없이 흘러가듯 삶을 살아갔다. 남들이 좋아하는 것에 맞장구나 치며, 어른들이 하라는 대로 사는. 의미라고 꼽을 만한 게 없는 삶이었다. 그러던 고1의 여름방학. 문제집을 사러 들어간 시내의 어느 대형 서점에서 서윤은 홀린 듯이 엽서 하나를 집게 되었다. 푸른색의 네발 달린 짐승이 바다 한 가운데에 서 있는 그림이었다. 새벽녘의 보라색 하늘, 회오리치고 있는 검은 파도. 그 위를 당당하게 달리고 있는 푸른 짐승은 파도를 향해 뛰어오르고 있었다. 그 위로는 검은 수묵화가 액자 틀처럼 그들 앞에 그려져 있었다. 서윤은 엽서에서 시선을 뗄 수 없었다. 평소였으면 그저 지나쳤을 평범한 엽서. 하지만 푸른 색감과 동양적인 그림 스타일이 유독 서윤의 시선을 채갔다. 서윤은 마치 그림에 그려진 짐승이 된 듯한 기분을 느꼈다. 작게 일어난 잔물결은 이내 푸른색으로 크게 퍼져나갔고, 거대한 파도를 대적할 수 있는 건 오직 서윤, 자신뿐이었다. 그리고 이 모든 건 누군가가 지켜보는 한 폭의 이야기일 뿐.

 

서윤은 고개를 들어 가판대에 적힌 글귀를 읽었다.

 

‘신예 일러스트레이터 ‘파란;’과 구름서고의 콜라보!’

 

이 엽서를 그린 사람의 이름은 ‘파란;’이었다. 서윤이 들고 있는 엽서 옆에는 그 외에도 다양한 파란의 그림이 여러 제품으로 나와 있었다. 다른 엽서에는 어두운 남색 빛으로 시들어가는 롯데타워 아래에서 검은 부채로 어딘가를 가리키고 있는 푸른 머리색의 선비. 그리고 그 선비의 손끝을 따라 달려 나가는 황금빛의 호랑이 수십 마리가 그려져 있었다. 그 옆에 전시된 스티커에는 길거리에서 쉽게 볼 수 있는 버스 정거장에 푸른 짐승이 앉아있었고, 금속 책갈피에는 네오 고딕 양식의 도서관에서 특이한 한복을 입은 선비가 구름을 이용해 책을 정리하고 있었다. 가판대에 있는 모든 그림에는 네발 달린 푸른색의 짐승을 뜻하는 무언가가 꼭 그려져 있었다. 심지어 가판대에 적혀져 있는’ 파란;’의 글씨 위에도. 푸른 짐승은 황금빛 눈을 치켜세우고서 서윤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어떤 형태로든 늘 그 짐승은 그림 안에 그려져 있었다. 서윤은 태어나서 처음 보는 특이한 소재의 그림을 보고 매료당했다. 그날, 서윤의 마음속에서는 작지만 표독스러운 파도 소리가 천천히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서윤은 집에 돌아오는 길에 휴대폰으로 '파란;'에 대한 모든 것을 검색했다. 그의 모든 SNS 계정들을 팔로잉했고, 그의 그림이 그려져 있는 물건이라면 무엇이든지 간에 천천히 돈을 모아 하나하나씩 사서 모으기 시작했다. 서윤은 '파란;'의 공개된 정보들을 조금씩 종합해보았다. '파란;'은 서윤과 비슷한 연령대였고, 서울 안에 있는 예술대학교들을 지망하고 있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서윤은 얼마 지나지 않아 그림을 배우기 시작했다. 집안에서는 한차례 반대했지만, 서윤의 열정은 절대로 꺾이지 않았다. 높지도 낮지도 않은 적당한 성적에 장래 희망이나 하고 싶은 것도, 좋아하는 것도 없었던 딸이 무언가에 열정을 가지고 높은 성적을 받아오자 서윤의 부모님은 서윤이 입시 미술을 시작하는 것을 허락했다. 하지만 입시의 현실은 달랐다.

 

 

학교에서 버스로 1시간 거리에 있는 번화가에 자리 잡은 학원. 서윤은 학교가 끝나면 곧바로 버스를 타고 학원에 갔었다. 서윤은 그곳에 도착하는 6시부터 밤 10시까지 캔버스 앞에 앉아 끝없이 그림을 그렸다. 그것도 서윤이 원하지 않는 그림들을. 선생님들의 가스라이팅과 학원 친구들의 경쟁의식. 그림 실력은 괜찮은 작품 하나를 완성하기 무섭게 끝없이 내려갔다. 그러고는 아주 조금씩 올라오기 시작했다가 다시 내려가기를 반복했다. 흔히 ‘슬럼프’라고 불리는 현상이었다. 그림 실력이 올라가기 위해서는 당연한 현상이라고는 했지만. 처음 그림을 배우기 시작한 서윤에게는 혹독한 시기였다. 서윤은 잠자는 시간을 줄이며 그림 독학과 학교 공부를 병행했다. 하지만, 그러면 그럴수록 서윤은 자신과 '파란;'의 격차를 극심하게 느꼈다. 서윤은 '파란;'에게 다가가고 싶어서 그림을 배웠지만, 오히려 '파란;'은 서윤에게서 점점 더 멀어지기 시작했다.

 

 

서윤이 그 해, 겨울방학을 맞이했을 때였다. 서윤은 재미로 파란의 그림을 한번 따라 그려봤다. 처음에는 고되고 힘든 작업이었지만 얼마 되지 않아 그것은 완연한 '파란;'의 그림이 되었다. 서윤은 자신이 완성한 파란의 그림을 조용히 바라보았다. '파란;'은 디지털 일러스트레이터로 캔버스가 아닌 태블릿으로 그림을 그렸다. 하지만 그런 그림을 완벽하게 캔버스 위에 재현해낸 서윤은 해변에서 일어나는 작은 잔물결의 심장 소리를 제 안에서 들었다.

 

 

서윤은 '파란;'의 그림을 그려냈던 경험을 따라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이전보다 나아진 선생님의 평가. 그와 반대로 학원 아이들은 서윤의 그림 스타일과 '파란;'의 그림 스타일의 유사성을 느끼기 시작했다. ‘파란;’은 현재 SNS와 업계에서 신예 아티스트로 유명했기에 학원 아이들의 대부분은 ‘파란;’을 알고 있었다. 서윤이 자신의 스타일을 완전히 죽이고, 오직 입시 미술에 중점을 두어 그림을 그렸을 때에도. 여전히 '파란;'의 분위기는 서윤의 캔버스 위에 남아있었다. 서윤은 매일 밤, 집에 들어가 태블릿에 '파란;'이 SNS에 올리는 그림들의 분위기와 스타일을 따라 하고, '파란;'이 사용하는 특유의 선을 따라 그리며, '파란;'의 아류작들을 생산했다.

 

 

 

 

"건배~“

 

잔이 부딪치는 소리가 고깃집을 가득 메웠다. 처음으로 종강을 맞이한 서윤은 어리숙하게 자신의 술잔이 채워지는 것을 바라보았다. 황금빛 액체가 서윤의 투명한 잔 안에 채워졌다. 서윤은 여전히 적응이 안 되는 알코올의 쓴맛을 받아들이며, 대학 동기들과 어색하게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서윤이는 보니까 동양화에 관심이 있던 거 같은데, 혹시 그릴 때 참고하는 자료라도 있어?“

 

서윤의 맞은편에 앉아있는 청우가 서윤에게 말을 걸었다. 서윤은 청우가 예의상 말을 건 것 치고는 자신에 대해 잘 알고 있어서 놀랐다.

 

 

학과 이름 끝에는 늘 이청우라는 꼬리표가 있었다. 훤칠한 외모에 키 187cm. 사회성이 좋고, 성격도 밝아 그의 주변에는 늘 사람이 있었다. 입도 무거울뿐더러 재능도 많아서 동아리 이곳저곳에서 데리고 가려고 난리인 선배였다. 실제로 연극 동아리와 댄스 동아리에서 각각 올린 청우의 두 영상은 조회수가 천만이 넘었다고 했다. 연예계에서도 몇 번 연락이 왔었지만, 그림에 집중하고 싶다는 이유로 청우는 모든 러브콜들을 거절하고 있었다. 심지어 아티스트에게 밥줄이라는 개인 SNS도 없이 청우는 오직 문자와 이메일만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청우에게 쏟아지는 외주 의뢰는 끝이 없었다.

 

 

"아, 저는 전통 설화에 관심이 많아서요. 관련 서적들을 읽으면서 떠오르는 이미지를 그려내는 편이에요."

 

서윤의 대답에 같은 테이블에 앉아있던 복학생 선배가 맞장구를 쳤다.

 

"우리 청우도 한국 전통 설화 좋아하는데, 그 맨날 그려대는 강아지 이름이... 해태였나?“

 

선배의 말에 청우가 웃으며 말을 이어 나갔다.

 

"맞아요. 이번에 새로 이사한 작업실 이름도 해태라고 지었어요.“

 

서윤은 놀란 듯 제 입을 한 손으로 가렸다.

 

"저도 해태 좋아해요. 동아시아 쪽 설화잖아요. 특히 해태의 푸른색이 특이하더라고요. 정말로 신화 속의 동물같이 느껴지고.“

 

'파란;'의 그림에서 나온 푸른색의 네발 달린 짐승. 그건 바로 해태였다. 충직한 성격에 선악을 가르는 짐승. 해태는 주로 동아시아 쪽에서 그려내는 상상의 동물이었다. 물론 서윤은 해태를 좋아하지 않았다. 단지 서윤은 '파란;' 그가 자신을 생각하며 그려낸 그의 해태를 좋아했다.

 

 

 

"야, 너 서윤이랑 친하더라.“

 

대학로 앞 싸구려 고깃집 뒤에서 디지털 드로잉 학과 남학우들이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아, 한서윤? 뭐, 너 말대로 예쁘긴 하더라. 그림도 잘 그리고.“

 

청우는 불을 붙이지 않은 담배의 필터를 질겅거리며 말했다.

 

"하지만, 부족해. 자기한테 안 맞는 걸 억지로 그려내고 있어. 특히 파란색. 동양풍은 그렇다고 치는데. 전체적인 분위기에 안 맞아도 억지로 쨍한 파란색을 짜내서 그려내.“

 

“또 선배질 한다. 네가 무슨 교수냐? 그러지 말고 너 휴대폰 비밀번호나 알려줘. 아까 애들이랑 같이 찍은 사진 좀 보게.”

 

“내 생일. 나는 전부 다 그걸로 해 놓았잖아. 나 은근 기억력이 안 좋아서, 생일 아니면 기억 못 해.”

 

 

청우는 몇 달 전, 신입생 OT가 지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를 떠올렸다.

신입생이 들어오고 한 달이 지났을까, 어느 순간부터 학과 동기들 입에서 알음알음 서윤의 이름이 오르내렸다. 이유는 간단했다. 신입생이 감히 학과의 꽃이라 불리는 청우의 그림을 표절하고 있다는 이야기였다. 청우는 처음에는 그러려니 하고 지나쳤지만, 그 말을 거의 모든 학과생에게 듣게 될 즘에는 서윤이라는 신입생에게 신경이 갈 수밖에 없었다. 청우가 학과생들 몰래 하는 SNS에서는 사실 청우의 그림을 따라 그리는 일명 ‘카피캣’들이 많았다. 그들은 주로 취미로 그림을 그리거나, 이제 막 그림을 그리기 시작해 저작권 의식이 없는 어린 학생들이었다. 그럴 때마다 청우는 누구보다도 빠르게 당사자와 사건을 해결했고, 가끔은 자신의 계정을 구독하고 있던 이들이 먼저 청우보다 앞서서 일을 해결해 준 적도 있었다. 이런 경우를 업계에서는 소위 ‘카피캣’이라고 불렀다. 업계 용어가 따로 있을 정도니 당연하게도 이런 일들은 청우에게만 일어나는 일이 아니었다. 미디어 매체가 발달하고, 업계의 수요가 점점 높아지다 보니 자연스레 일어나는 일이었다. 그렇기에 청우에게 이런 일은 예사롭거나 특별한 일은 아니었다. 다만 귀에 거슬릴 뿐이었다.

 

 

평범한 삼류 지방대도 아닌 인서울에 성적은 물론 실기 커트라인도 높고, 면접도 무려 2차에 걸쳐서 하는 예술대학교의. 그것도 가장 많은 지원도를 보이는 디지털 드로잉 학과에서 어떤 멍청이가 선배의 그림을 따라 그리는 걸까 청우는 궁금해졌다. 못내 청우는 평소 친하게 지내던 조교를 구슬려 서윤의 그림 자료들을 얻게 되었다. 청우는 서윤이 과제로 낸 그림들을 보자마자 알았다. 확실히 서윤이 과제로 내는 그림들은 대부분 청우가 1학년 때 그려낸 그림들과 닮아있었다. 하지만 청우는 정확히 서윤이 무엇을 따라 하고 있었는지 바로 알 수 있었다.

 

 

서윤이 과제로 낸 작품들 끝에서 청우는 서윤의 개인작, 교수님과의 면담 이후 그려서 제출한 그림들을 모아둔 폴더를 발견했다. 개인작 또한 다른 그림들과 마찬가지일까 생각하며, 청우는 마우스패드를 두어 번 꾹꾹 눌러 폴더를 열었다. 그 폴더 안에 들어가 있는 그림들을 발견했을 때, 청우는 액정 너머에 그려진 그림에 넋을 잃었다. 분홍빛이 도는 붉은 화염 안. 검은 재로 변해가는 사람들은 절규하고 있었다. 화면 중앙에는 검은 여성이 불을 향해 등을 돌리고 있었다. 마치 거룩한 분노를 관찰하는 저승사자처럼. 그녀는 불에 타오르고 있는 불 속의 사람들을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평범한 사람이 보기에는 그저 잘 그린 그림으로 보일지도 몰랐다. 하지만, 청우의 시선은 계속 그 분홍빛의 불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불 속에서 타오르는 이들은 고통스러워 보이는 동시에 환희로 달구어진 듯한 묘한 분위기를 내고 있었다. 한참 동안 그림을 바라보던 청우가 마침내 시린 눈을 감았을 때, 미세하게 마우스가 움직이며 한서윤이라는 파일의 이름이 나타났다.

 

 

그날 후로 청우는 서윤의 그림에 흥미가 생겼다. 서윤의 그림은 여전히 거의 다 푸른색이었고, 구도나 인물의 연출 또한 청우의 그림과 유사했었다. 서윤은 다른 분위기도 잘 그려낼 수 있었다. 그런데도, 서윤은 계속 '파란;'의 그림에 집착하고 있었다. 청우는 서윤의 개인작을 본 그날 이후로 서윤의 불덩이들을 머릿속에서 떨쳐낼 수 없었다. 청우는 자기 작품이 표절당했다는 사실보다 서윤의 색깔에 더 많은 신경이 쓰였다. 심지어 청우는 매일같이 서윤이 그려낸 불 속으로 자체의 몸을 내던지는 꿈을 꾸기도 했다. 뜨거운 열기 속에서 온몸이 녹아 흘러내릴 때쯤에서야 청우는 식은땀을 흘리며 잠에서 깨어났다. 이미 청우의 마음속에는 불을 싣고 떠다니는 거대한 파도가 하나둘씩 휘몰아치고 있었다.

 

 

 

뜨거운 종강이 끝나자 서늘한 가을의 향기와 함께 학기가 시작되었다. 학기가 시작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학과에서는 싸움이 일어났다. 서윤은 여전히 ‘파란;’의 그림들을 베껴왔고, 서윤을 유독 고깝게 보던 학과 선배들 중 유독 서윤에게 집착하던 복학생 하나가 청우의 과거작들과 비슷한 서윤의 그림들을 지적하며 서윤을 괴롭히기 시작했다. 복학생은 청우에게 모든 것을 말하겠다며 서윤을 협박했다. 그리고, 이를 빌미로 복학생이 서윤의 몸에 손을 대려고 한 날, 서윤은 선배의 멱살을 잡았다. 복학생이 1학년의 몸에 손을 대려고 했었고, 1학년이 복학생의 멱살을 잡은 일은 학과를 넘어 대학교 익명게시판까지 시끄럽게 만들었다. 그리고, 그 일이 일어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청우는 대학교에서 조금 떨어져 있는 카페로 서윤을 불렀다.

 

 

대학교에서 조금 멀리 떨어져 있고, 골목 안쪽에 들어서 있는 카페는 카페보다는 다방에 가까운 분위기를 하고 있었다. 허름한 외부를 바라보며 서윤은 몇 번이나 청우가 준 주소를 다시 확인했다. 서윤이 카페 안에 들어서자 외부와 다를 바 없이 촌스럽고 고전적인 분위기의 인테리어가 서윤의 눈에 들어왔다. 카페 내 손님들은 나이가 든 동네 어르신 한 둘 정도로. 카페는 전체적으로 조용한 분위기였다. 서윤은 카운터로 걸어가 메뉴판을 바라보았다. 메뉴는 카페의 분위기와는 다르게 다양하고 평범했다. 서윤은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한 잔 주문했다. 서윤은 청우가 앉아있는 테이블로 고개를 살짝 숙이며 청우의 맞은편에 앉았다. 청우는 웃으며 서윤을 맞이했다.

 

“여기까지 오는데 많이 힘들었어?”

 

“아, 아뇨. 괜찮았어요.”

 

어색한 인사말이 두 사람 사이의 기류를 채울 때쯤.

주인 할머니께서 서윤이 주문한 아이스아메리카노를 가지고 왔다.

 

“우선 마시면서 이야기할까?”

 

서윤은 청우가 자신을 부른 이유를 어림짐작하고 있었다. 최근에 서윤이 복학생인 재민의 멱살을 잡고 욕지거리를 내뱉었기 때문이다. 신입생 OT 때부터 서윤에게 전화번호를 물어보던 재민은 야심한 밤에 서윤에게 전화를 걸었고, 서윤 본인 앞에서 장난으로 서윤을 스토킹하고 싶다고 말하곤 했다. 심지어 예전에도 신입생 여학우를 이런 식으로 괴롭히다가 여학우에게 애인이 생기자 군대로 도망갔다가 다시 온 걸로 재민은 학과 내에서 유명했다. 서윤은 재민에게 번호를 따인지 얼마 지나지 않아 연락처에 그의 이름을 ‘잠재적 범죄자 강재민’이라고 저장해둘 정도였다. 재민은 주로 서윤에게 청우의 그림과의 유사성을 지적하며 자칭 의형제인 청우에게 서윤이 한 만행을 알리겠다고 협박했었다. 서윤은 당연하게도 재민의 말을 믿지 않았다. 하지만, 재민의 멱살을 잡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청우가 서윤을 대학교에서 멀리 떨어진 골목 카페로 불러내자 서윤은 정말로 재민의 말이 맞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서윤이 카페에 도착해 청우의 얼굴을 봤을 때, 서윤은 어젯밤 찾아본 휴학계를 속으로 떠올렸다.

 

 

“내가 너를 이곳까지 부른 이유는…”

 

“제가 재민 선배랑 싸워서 그런 거죠? ”

 

서윤은 청우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자신이 추측한 이유를 말하곤 고개를 숙이며 사과했다.

 

“어? 아, 그것도 맞긴 하는데, 다른 것도 있어서 불렀어.”

 

서윤은 고개를 들어 청우를 마주 봤다.

 

“너, 재민 형이랑 그렇게 된 이유가. 네가 나를 표절했다는 오해가 생겨서 그렇다며? ”

 

서윤은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이미 다 알고 있어. 너는 나를 따라 하는 게 아니잖아? ‘파란;’을 따라 하는 거지.”

 

서윤은 청우의 입에서 나온 이름에 당황한 듯 눈을 크게 떴다.

 

“네가 나를 따라 한다는 소문이 공공연한데, 왜 형 빼고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지. 궁금한 적 없었어?”

 

“더 큰 일을 만들고 싶지 않아서 가만히 계시던 게 아니었나요? 이미 재민 선배가 그 일을 공론화하고 있는데 추가로 더 말을 얹을 필요도 없고요.”

 

청우는 살짝 입꼬리를 올리며 말을 이어갔다.

 

“정확한 이유는. ‘당사자가 괜찮다고 했기 때문’이야. ‘파란;’의 그림은 유명해서, 이 업계에서 일하는 이들은 거의 다 ‘파란;’의 그림을 알고 있어. 네 그림과 ‘파란;’이 그리는 그림의 유사성 정도는 두 그림을 한 곳에 같이 두면 그림을 잘 모르는 사람들도 한눈에 알 수 있을 것이고. 하지만, 그런데도 다들 아무 말도 안 하는 건. 내가 괜찮다고 했기 때문이야.”

 

청우는 혼란스러워하는 서윤의 얼굴 앞으로 자신의 휴대폰을 내밀었다.

휴대폰에는 파란의 SNS 계정 정보를 수정하는 창이 떠올라 있었다.

 

“내가 ‘파란;’이야.”

 

 

 

서윤은 머리가 어지러웠다. SNS의 계정 정보 수정은 계정의 주인만 할 수 있었다. 그 말은 즉, 청우는 ‘파란;’이었다는 소리였다. 서윤은 그림을 시작하고 자기 눈으로 직접 본 업계의 상황이 떠올랐다. 하루에도 많은 작가가 다른 작가의 그림을 표절하고 따라 해서 논란이 되고, 업계에서 내쳐졌다. ‘카피캣’이라는 용어를 붙일 수 있을 정도로 자신이 하는 일들이 잘못된 것임을 서윤은 이미 예전부터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서윤이 ‘파란;’의 그림을 계속 따라 했던 이유는. 수 없이 보고, 수 없이 따라 그린 끝에 마침내. 서윤은 ‘파란;’이 아닌 그림을 그릴 수 없게 되었다. 자신이 그려낸 그림들이 고작 표절작에 불과한 ‘파란;’의 아류작들임을 잘 알고 있었지만, 서윤은 멈출 수가 없었다. 서윤은 ‘파란; ’외에는 아무것도 모르게 되었다.

 

“너 재민이가 처음으로 협박한 날 수업 도중에 사용한 ppt 배경. 재작년 ‘파란;’의 그림으로 만들어진 제품 행사 프로모션 홍보물의 배경을 거의 똑같이 그려내서 ppt에 사용했지? 그 외에도 과제의 대부분을 ‘파란;’의 화풍으로 그려냈고, 교수님께서는 몇 번 너에게 경고하셨던 걸로 기억해.”

 

청우는 반쯤 식어버린 에스프레소를 홀짝였다. 그 한 모금의 시간 동안 서윤은 휴학계가 아닌 자퇴서를 써야겠다고 생각했다. 애초에 각오하고 시작한 일이었지만, 막상 상상하던 일이 눈앞에 일어나니 미칠 것만 같았다.

 

서윤이 고3이었던 시절. 서윤은 SNS에서 ‘파란;’과 댓글로 자주 대화를 나누던 일러스트레이터가 자신의 게시글에서 한 비공개 계정과 한참을 댓글로 대화하는 것을 보았다. 서윤은 일부러 ‘파란;’에 대한 정보를 모으기 위해 매일같이 ‘파란;’과 친한 일러스트레이터들의 댓글과 게시글들을 자세히 살펴보긴 했지만. 그 일러스트레이터와 대화를 나누고 있는 비공개 계정은 계정 특성상 일러스트레이터가 남기는 대댓글에 아이디만 보였고, 대화 내용도 프로필도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일러스트레이터가 남기는 대댓글의 내용에는 자신의 그림보다 ‘파란;’의 그림이 더 나은 거 같다는 내용이 담겨있었고, 서윤은 3개월 동안 그 비공개 계정을 주의 깊게 보았다. 어느 날, 딱 30초 동안 그 비공개 계정이 공개 계정으로 바뀌어 있었다. 계정의 주인이 모종의 이유로 잠시 계정을 공개 계정으로 바꿔둔 것이었다. 서윤은 망설임 없이 비공개 계정을 팔로잉했다. 비공개 계정일 때 팔로잉을 걸면 대부분 받아주지 않지만, 비공개 계정을 공개계정으로 풀었을 때 팔로잉을 걸면 당사자가 직접 차단하지 않는 한 팔로잉을 일방적으로 계속할 수 있다. 마치 구독처럼. 그리고, 그 비공개 계정에서 한 학교가 언급이 된 적이 있었다. 그 게시글은 정말 수십 초도 지나지 않아 지워졌지만, 서윤은 그 학교의 이름을 기억해냈고, 결국 그곳으로 대학을 진학했다. 대학교에 합격했을 때만 해도 설마 ‘파란;’을 만날 수 있지 않을까 설레발을 쳤지만, 그게 현실이 될 거라고는 믿고 싶지 않았다.

 

“나도 처음에는 당연히 기분이 나빴어. 왜 내가 평생을 노력해서 찾은 화풍을 이렇게 단 한 순간에 빼앗겨야 하나 화도 많이 났었고. 그런데, 네가 교수님에게 혼나고 개인 면담으로 그려낸 그림이 내 머릿속을 안 떠나더라고.”

 

서윤은 고개를 숙이고 진심을 담아 청우에게 사죄했다. 서윤은 자신이 얼마나 창피한 일을 했는지 마음속 한구석에서부터 진작에 이미 알고 있었다. 하지만 서윤은 그 마음을 외면해 왔었고, 외면해 온 마음 한구석에서는 부끄러움이 차곡차곡 1년이 넘도록 쌓여왔었다. 그리고, 서윤은 지금 신에게 닿기 위해 인간이 쌓은 바벨탑만큼 높은 수치심을 마주하였다. 지금 서윤은 자신의 신에게 형벌을 받고 있었다.

 

“한서윤. 나한테 개인 교습받아볼 생각 없어?”

 

그리고 그 형벌은 서윤에게 놀랍게도 아주 달콤했고, 동시에 두려웠다. 서윤은 떨리는 손을 테이블 아래로 숨기고서 청우가 한 말을 이해해보려 노력했다. 청우가 ‘파란;’인 것으로도 모자라 서윤을 감싸주고, 한낱 신입생인 서윤이 그린 그림을 기억하고 있다는 것까지도 혼란스러운데, 청우는 지금 자신의 그림을 표절한 후배에게 개인 교습을 해주겠다고 말하고 있었다. 서윤은 갑자기 몰아닥친 정보량에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너 취미가 회화라며, 교수님에게 낸 그림도 캔버스에 그린 그림을 액정 위에 그대로 옮겨둔 거라고 조교 형한테 들었어. 나도 마침 회화에 관심이 있었거든. ‘파란;’의 그림은 고작 0과 1로 나누어진 디지털 세계 안에서만 볼 수 있어. 디지털 세계 안이라도 그림은 대체 불가능하다는 말이 있던데. 난 NFT에 별로 관심이 없어서… 그냥…”

 

청우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가 천천히 고민하며 입을 열었다.

 

“...‘파란;’의 팬들이 사랑하고 있는 그림이 실체가 없는 전자 코드 서너 개일 뿐이라니 허무했어.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것을 사랑하는 그들이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래서 직접 캔버스에 그림을 그려 내보고 싶다는 생각이 어느 순간부터 들기 시작했어.”

 

서윤은 눈을 껌뻑이며, 자신이 지금 듣고 있는 것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런 모습을 보던 청우는 재미있다는 듯이 피식 웃으며 이야기를 이어 나갔다.

 

“나는 입시 미술 이후로 캔버스랑 유화물감을 잡아본 적이 없어서, 그림이 잘 안 나오더라고. 학원에 다니는 건 썩 취향이 아니었고. 그러니까, 내가 실체가 있는 ‘파란;’의 그림을 그릴 수 있게, 네가 나를 도와줘. 나는 네가 너만의 그림을 제대로 그릴 수 있게 도와줄게.”

 

청우는 티 하나 없이 깨끗한 눈으로 서윤의 눈동자를 바라보며 자신의 두 손가락을 펼쳐 보였다.

 

“자, 네가 고를 선택지는 2개야. 나랑 개인 교습할래? 아님, 카피캣이라는 꼬리표를 이기지 못하고 휴학할래?”

 

서윤은 크게 한숨을 쉬었다. 정답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 학교를 계속 다니면서 자신이 경애하는 ‘파란;’에게 직접 그림을 배울 기회가 지금 당장 자신의 눈앞에 나타났다. 하지만 그 기회의 대가가 무엇일지는 그 누구도 알 수가 없었기에 서윤은 두려워했다.

 

“학원을 싫어하신다고 해도 말이 안 맞아요. 정 원하신다면 복수 전공을 하셔도 좋고, 스터디 모임이든, 동아리든 가시면 되는데. 왜 취미로 회화를 하는 아마추어에게 꼭 그림 수업을 받고 싶어 하시는 거예요?”

 

청우는 한참을 골똘히 고민하다가 이내 입을 열고서 해맑게 웃었다.

 

“그냥... 가벼운 팬서비스인 걸로 할까?”

 

서윤은 결국 열심히 유지하고 있던 포커페이스를 잃고, 이마에 인상을 찌푸렸다. 지금 상황을 거절하면 불리한 건 서윤이였다. 그렇다고 반대로 청우에게 유리한 것도 아니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청우가 얻는 이득은 없었다. 청우는 가벼운 팬서비스라고 지칭했지만, 그마저도 전혀 가볍지 않았다. 세상에 그 어떤 작가가 자신의 표절범과 함께 작업을 하고, 인적이 드문 카페에 마주 앉아 이야기하겠는가. 하지만, 서윤에게 남은 선택지란 없었기에. 서윤은 호흡을 한번 고르고서 다시 표정을 고치고 청우에게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앞으로 잘 부탁드릴게요. ‘파란;’님.”

 

 

 

 

서윤은 천천히 청우의 도움 아래 자신의 취향을 알아가게 되었다. 개인 교습은 매주 금요일 저녁 8시부터 10시까지 학교 실습실에서 진행되었다. 격주로 서로가 서로에게 멘토·멘티가 되어 각자가 가르쳐줄 수 있는 것을 최대한으로 가르쳐주었다.

 

그러던 어느 날 청우가 서윤에게 물었다.

 

“너는 왜 그토록 ‘파란;’에게 집착하는 거야? 그림 잘 그리는 사람들은 예전에 비해서 훨씬 많아졌고. 동양풍의 그림을 그리는 사람들은 여전히 성행하는 와패니즈와 오리엔탈 때문에 널렸고. 한국 전통의 분위기를 전문적으로 살리는 작가들은 적지만 예전에 비하면 그것도 많이 늘어나는 추세잖아. 왜 하필 나였어?”

 

청우의 질문에 서윤은 웃으며 대답하였다.

 

“알아요. 하지만, 제 그림과 다른 그림들에서는 파란이 보이지 않았어요… 오빠의 그림을 처음 봤을 때의 그 느낌. 심장이 격랑을 일으키던 그 순간을. 저도 담아내고 싶어요. 태어나서 그렇게 심장이 빨리 뛴 적은 처음이었어요. 그게 모니터 너머든 캔버스 위 든 상관없어요. 흑백으로 된 무성 영화 같은 누군가의 삶에 제가 오빠의 그림에서 봤었던 거대하고도 푸른 파도를. 내가 느꼈던 그 파란(波瀾)을 그들에게도 보여주고 싶었어요.”

 

 

청우의 ‘파란;’이라는 닉네임은 사실 그의 이름에서 따온 닉네임이었다. 물론 청우의 이름은 푸를 청(靑)자가 아닌 맑을 청(淸)자였다. 하지만 청우는 어감이 비슷하다는 이유로 대충 파란이라는 이름을 지었고, 심지어 뒤에 딸려 온 세미콜론은 오타였다. 청우가 나중에 이름을 바꾸려 했을 때는 이미 ‘파란;’이 유명해지고도 남았을 시기였다. 청우는 대충 지은 이름에 큰 물결을 뜻하는 파란(波瀾)이란 뜻은 자신에게는 사치라고 생각했다. 주변의 성실하다는 평가에 비해 포트폴리오 백업을 목적으로 만들었던 계정의 이름도 아무렇게나 짓는 게으른 자신에게 커다랗고 시시각각 움직이는 파도의 시련은 어울리지 않는다고 청우는 생각했다.

 

“아, 청우 오빠. 여기 오는 길에 물감 나이프 사 왔어요?”

 

“응. 내 가방에 있어.”

 

서윤은 청우의 가방을 살펴보았다. 지퍼 위에는 작은 자물쇠가 장신구처럼 걸려있었다.

 

“가방에 뭐 숨기는 거라도 있어요?”

 

“아, 예전에 사이가 안 좋았던 동기 하나가 내 가방에 일부러 썩은 우유를 부은 적이 있었거든. 그 후로 가방에 작은 자물쇠를 걸어두었어. 번호는 내 생일. 나는 전부 다 그걸로 해 놓았어. 나 은근 기억력이 안 좋아서, 생일 아니면 안 돼. 나 입 무겁다는 소문도 사실은 기억력이 안 좋아서 까먹은 건데. 어느샌가 의리 있는 애로 와전됐더라.”

 

서윤은 청우에게도 의외인 면이 있다고 생각했다. 늘 완벽한 유명인이라고 생각했던 청우가 건망증이 심하다니. 서윤은 세상에 완벽한 사람은 없다는 걸 깨달았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청우는 군대를 다녀왔고, 서윤은 끝없이 자신의 취향을 찾아 헤매었다. 좋아하는 것을 청우와 함께 하나둘씩 만들어보고, 청우와 함께 여행을 떠나보기도 하고, ‘파란;’의 작은 개인 작품전을 함께 열어보기도 했다. 그리고 그 끝내. 서윤은 그토록 자신이 원하던. 자기 자신만의 것을 그림에 담아낼 수 있게 되었다. 비현실적인 원색 계열의 푸른색이 아닌. 자신의 성격과 꼭 맞는 분홍빛의 붉은색을 더 많이 애정하게 되었고. 디지털 드로잉 특유의 미니멀리즘보다는 화려하고 유화 같은 붓 터치 형식의 일러스트를 그리게 되었다. 청우와 개인 교습하게 된 지 3년 4개월이 지나. 서윤은 어느새 학과 수석으로 빛을 내며 졸업작품 전시회가 열리는 학교 근처 미술관 중앙에 자신의 졸업작품을 걸 수 있게 되었다.

 

 

“네 그림. 기대되는걸? 결국 끝까지 나한테 안 보여줬잖아.”

 

“지금 보러 가는데 뭐가 그리도 궁금해요? 미술관이 생각보다 작아서 들어가자마자 보일 거예요.”

 

“나 휴대폰 작업실에 두고 와서 사진도 못 찍는데… 대신 네 폰으로 찍어도 괜찮지?”

 

“세상에 자기 그림을 본인 폰으로 찍는 사람이 어디 있어요. 오늘 전시회 첫날이니까 내일 와서 찍고 가시면 되겠네요. 정 그러시면 원본이라도 보내드릴게요.”

 

서윤이 매표소에서 청우의 표와 자신의 표를 함께 끊고서 미술관 안으로 들어갔다. 설렌 마음으로 그림 앞에 도착한 그들의 앞에는 상상치도 못한 것이 기다리고 있었다. 서윤의 졸업작품이 있어야 할 미술관 중앙 벽에는 빔프로젝터로 비치는 서윤의 그림 뒷벽을 다 채울 정도로 커다란 ‘COPY CAT’이라는 붉은 그라피티가 그려져 있었다. 다들 그라피티가 졸업작품의 일부분이라 생각하며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은 것으로 보였다.

 

 

청우는 붉은 그라피티를 본 순간 서윤의 손목을 붙잡았다. 그리고 청우는 서윤의 얼굴을 천천히 바라보았다. 서윤의 얼굴은 새하얗게 변하기 시작했다. 서윤의 손목을 잡은 청우의 손 너머로 파르르 진동이 느껴졌다. 진동이 느껴질 때마다 청우는 더 강한 힘으로 서윤의 손목을 잡기 시작했다.

 

“아니야… 제발 도망치지 마. 누가 이랬는지 용의자라도 추려봐. 응? 제발 도망치지 말고! 아니야…넌 더 이상 내 그림자만 쫓아오던 1학년 한서윤이 아니야. 제발 정신 차려.”

 

청우의 목소리는 점점 더 무너져내렸다. 청우는 서윤에게 격려보다는 절망에 가까운 감정을 내뱉었다. 원래대로였다면 우선 자리를 피하고 서윤을 진정시킨 후. 범인을 천천히 색출해 냈을 것이다. 하지만, 청우는 그러고 싶지 않았다. 청우는 서윤이 지금 이 자리를 피하는 꼴을 보고 싶지 않았다. 아주 오랜 시간 외면해왔던 자신의 그림을 빼앗겼다는 분노가 결국에는 분출된 건지. 아니면 그저 서윤을 향한 개인적인 가학심인지. 서윤의 반응이 그저 궁금했던 건지는 청우 자기 자신조차도 몰랐다. 청우는 아무리 생각해도 자신이 하고있는 행위의 정체와 의미를 알 수 없었다.

 

서윤은 당장이라도 도망치고 싶었다. 제 손목을 거칠게 잡고 있는 청우의 손과 청우의 목소리가 서윤의 공포심을 더더욱 더 자극했다. 마치 인터넷 세상에서 지구에서 가장 더러운 범죄자가 되어 사람들에게 매도당하는 기분이었다. 눈을 감고 인터넷 코드를 뽑고 싶지만. 청우가 잡은 손목에서 느껴지는 고통으로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서윤의 눈앞에서는 자신이 양산해낸 표절작들이 펼쳐져 서윤을 비웃고 있었다. 얼마 전, 서윤은 협박 문자를 하나 받았다. 자신과 만나주지 않으면 모든 것을 폭로해버리겠다는 문자였다. 문자는 발신 제한에서 왔고, 서윤은 누군가가 자신에게 잘못 보낸 거로 생각했지만. 다시 생각해보면 누가 이런 짓을 했는지 쉽게 유추할 수 있었다. 강재민. 몇 년 전, 서윤이 멱살을 잡은 일이 점점 커지자 자신이 서윤의 몸에 손을 대려 했다는 것을 들킬까 봐 그는 해외로 어학연수에 갔었다. 어학연수에 가기 전부터 그는 서윤에게 문자를 했었는데, 어떨 때는 서윤에게 울면서 빌었고, 어떤 날은 자신과 만나주지 않은 것으로 화를 내기도 했었다. 서윤은 재민의 전화번호를 차단하고 자기 전화번호를 바꿨다. 서윤은 몇 달 전. 재민이 입국했다는 이야기를 동기에게서 들은 기억이 났었다. 하지만 기억해내고 싶지 않았다. 그저 이 자리를 박차고 나가고 싶다는 생각만이 서윤의 머리를 지배했다.

 

“싫어, 내가 왜?”

 

서윤은 한마디를 내뱉고서 청우의 손을 뿌리쳤다. 뒤에서 청우가 서윤을 불렀지만. 서윤은 뜨거운 불길에서 벗어나듯 청우를 버리고서 미술관 밖으로 도망쳤다. 뒤따라오는 청우에게서 도망치던 서윤은 미술관 앞을 지나가던 택시를 잡고서 아무 곳이나 가달라고 말했다. 택시는 몇 번 눈치를 보더니 이내 출발하기 시작했다. 운전석 백미러 너머로 속도를 높이며 떠나는 택시를 허망하게 바라보는 청우가 서윤의 눈에 들어왔다.

 

 

택시가 출발하고 미술관 근방을 벗어났을 때. 서윤의 눈시울이 점점 붉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내 서윤은 서럽게도 자신의 감정을 뜨겁게 쏟아내기 시작했다. 눈에서 솟구치던 감정은 멈추는 방법을 잃어버린 듯 서윤의 양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마치 뜨거운 불에 달궈져 녹아내리는 양초처럼. 서윤은 무너져내렸다.

 

“손님. 무산일 있으셨나보네예. 지는 부산에서 여기로 올라왔는데, 지는 부산에서 힘들 때 바다를 보곤 했습니더. 근데, 서울은 바다가 없더라고예. 그래서 지는 바다 대신에 한강을 봅니데이. 손님이 괜찮으시다면 한강에다가 내려드릴까예? 그 앞에 유명한 복합문화공간도 있다아입니까. 손님 미술관에서 타신 거 보니 예술이라도 좋아하시는 거 같던데. 그 복합공간은 1층이 여기 앞에 예대 학생들이 주로 대여한 작업실이 있고, 2층에는 카페가 있습니더.”

 

서윤은 코가 막힌 목소리로 택시 기사에게 감사하다는 말 한마디만 남겼다. 택시 기사는 백미러로 몇 번 서윤의 눈치를 보더니 올림픽 대교를 지나 한강 공원 변두리에 자리 잡은 복합공간에 서윤을 내려주었다. 택시 기사는 소리 없이 눈물만 흘리고 있는 서윤의 처지가 안타까웠는지 휴지를 건네주었고, 택시비도 조금 깎아주었다. 택시에서 내린 서윤은 자신이 그렇게나 많이 울었나 싶어 부끄러워졌다. 서윤은 1층 유리창 너머로 비치는 자신의 모습을 살폈다. 화장은 휴지로 닦아내어 번진 것은 지워졌지만. 서윤의 양 불과 눈가에 남은 눈물 자국은 서윤의 비참함을 부각하고 있었다. 서윤은 언젠가 읽어본 구약성경이 떠올랐다. 구름 꼭대기에 올라가 자신이 간절히 소망하던 가장 높은 이처럼 되고자 했지만 결국에는 지옥 끝, 깊고도 깊은 구렁의 바닥까지 떨어진 샛별. 나락 끝에 떨어진 천사. 루시퍼, 서윤은 자신이 그 성경에 나온 악마 같다고 생각했다. 교만하게도 감히 남의 자리를 탐낸 끝에 일어난 일이라고 생각하며 고개를 들자, 서윤의 눈앞에는 유리창 너머로 해태가 그려진 문 하나가 눈에 보였다.

 

'맞아요. 이번에 새로 이사한 작업실 이름도 해태라고 지었어요. ’

 

서윤은 순간적으로 1학년 첫 종강 날, 청우가 한 말이 떠올랐다. 서윤은 발걸음을 옮겨, 복합문화공간의 문을 열었다. 안에는 각각 번호가 적힌 작업실들이 노래방 부스처럼 설치되어져 있었다. 서윤은 천천히 01번 작업실 문 앞에 섰다. 문에는 해태가. ‘파란;’의 푸른 해태가 금빛의 눈을 치켜세우고서 서윤을 경계하고 있었다. 서윤은 천천히 손을 뻗어 키패드에 번호를 꾹꾹 누르기 시작했다.

 

‘번호는 내 생일. 나는 전부 다 그걸로 해 놓았어. 나 은근 기억력이 안 좋아서, 생일 아니면 안 돼.’

 

서윤의 귓가에는 4년 정도 된 오래전의 기억이 이상하게도 마치 어제 일처럼 생경하게도 울려 퍼졌다.

 

‘띠리링’

 

굳게 잠겨져 있던 작업실의 문이 경쾌한 알림음을 내며 열렸다.

 

문을 열자 전시회장에서 본 것보다 작은 휴대용 빔프로젝터가 작은 간이 책상 위에 올려져 있었다. 서윤은 전원 버튼을 눌러 빔프로젝터의 전원을 켰다. 빔프로젝터의 빛이 빔프로젝터와 연결된 컴퓨터의 그림을 스크린에 비춰주었다. 스크린에는 나체로 기이한 포즈를 취하고 있는 여성의 그림 위에 서윤의 사진을 붙인 것 같이 연출한 그림이 프로젝터에 비치고 있었다.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청우와의 개인 교습 이후로 서윤이 그린 그림들과 매우 유사한 그림들이. 우아하고 고풍스러운 푸른색의 그림들이 아닌 붉은색의 잔혹한 그림들이 프로젝터를 통해 스크린에 천천히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천천히 바뀌던 그림들은 어느 그림을 기점으로 멈추었다. 분홍빛이 도는 붉은 화염 안. 검은 재로 변해가는 청우가 절규하고 있는 그림이었다. 서윤은 천천히 스크린 중앙에 섰다. 서윤은 불처럼 보이는 스크린의 빛을 향해 등을 돌렸다. 서윤은 자신이 느끼고 있는 정체 모를 분노를 받아들이지 못했다. 지금 자신에게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 서윤은 그저 멍하니 붉은 스크린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사람에게 개성이라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그림은 개인의 자아라는 것을 표출하는 게 중요하다는 사실. 그 사실에 대해 서윤은 오직 한 사람만큼은 잘 알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모두 서윤과 똑같았다. 모난 것 없이 평범하고 동그랗던 서윤은 무미건조한 생에 취향이란 것도 없이 남들 살아가는 그대로 살아가다 파란을 맞닥뜨렸다. 아주 작은 파란은 서윤의 생을 뒤바꾸었고, 서윤에게는 파란이 생이 되었다.

 

“네가 왜 여기 있어? 너한테 전화를 걸려고 했는데 휴대폰을 두고 와서… 다시 찾으러 왔는데…. 너 어디까지 봤어?”

 

서윤은 작업실 문 앞에 선 청우의 상기된 얼굴을 보고 나서야 깨달았다. 어린아이가 자기의 잘못을 마주한 것처럼 난처한 표정을 지은 청우의 눈에는 더 이상 어린 서윤을 흔들어 놓았던 파란이 보이지 않았다. 그저 자신이 불러일으킬 파란을 두려워하는 어린아이가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우리가 일으키는 파도는 왜 타인에게… 서로에게 독이 되는 거죠? 내가 원하던 건 이런 게 아니야… 내가 본 파란은, 내 삶에 일어난 파란은 생명을 가득 짊어지고서 시련을 이겨 나아가는 해태였어. 자신에 삶에서 어떤 것이 선이고 어떤 것이 악인지. 자신의 개성을 구별하고 그것들을 어떻게 그림으로 그려낼지 판별하는 동물. 너는 자신을 그런 동물로 정체화해놓고서 이게 지금 뭐 하는 짓거리야.”

 

우리들은 아직도 미성숙한 아이였다. 파란을 불러일으켜 본 적도 없이. 무작정 일을 저질러 놓고서, 그것을 파란이라 외치고 있었다. 용기 있게 자신 안에서 파란을 일으키지도 못하고, 작은 발길질을 파란이라 말하며,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을 두려워하는 작고 연약한 존재였다.

 

“거친 파도 속에서 깨지고, 부서지고, 무너져도 결국 끝까지 살아남고, 나아가고, 노력하고, 시련 끝에 올 더 나은 미래에 대한 희망을 이어 나아가는 해태는. 나의 파란; 희망은 대체 어디로 간 거야? 애당초 존재는 했어? 모두 다 나의 착각이었어?”

 

“그게 아니라. 서윤아, 내 말 좀 들어줘.”

 

서윤은 청우의 말을 무시했다. 청우가 뭐라고 말을 하든 서윤에 귀에는 그저 변명거리로 들릴 뿐이었다. 서윤은 테이블에 놓인 펜을 들고 액정에 글씨를 쓰기 시작했다. 서윤이 몇 번 긋기 시작한 디지털 펜의 흔적은 스크린에 남겨졌다. 몇 초가 지났을까, 서윤은 펜을 내던지고서 작업실을 떠났다.

 

“전부 다 바보 같아.”

 

멍하니 빔프로젝터를 바라보던 청우에게 서윤은 속삭였다. 빔프로젝터에는 크게 ‘SHIT’이라는 글자가 남겨졌다.

작업실을 나온 서윤의 눈앞에는 한강이 강줄기를 따라 흐르고 있었다.

 

서윤은 빌어먹게도 예쁜 날이라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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