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세진(국어국문·4) 주시경교양대학 글쓰기교실 튜터

바야흐로 가을이다. 하늘은 높고 말은 살찐다는. 이런 가을날, 뱃살만 찌워서는 안 되지. 오랜만에 도서관에 가서 가지런한 책들 사이를 누비다 단단한 나무색의 시집을 한 권 빌렸다. 손택수의 시집, 󰡔나무의 수사학󰡕. 자주로에 앉아 따뜻한 햇살을 맞으며 읽어낸 시집 곳곳에서는 짙은 고동이 되기까지 안으로 품어낸 나무의 시간이 느껴졌다. 그리고 그 나무들 속에 내 소중한 사람이 우두커니 계셨다.

｢나의 아름다운 세탁소｣라는 시를 읽으면서 나는 내 몸의 주름을 생각했다. 여자는 가슴부터 늙는다고 한다. 그다음이 손끝, 그리고 눈가. 한번 주름이 지면 다시 펼 수 없기에 핸드크림과 아이크림이 필수가 될 수밖에 없는 여자의 삶을 생각하다 문득 아버지의 단호한 주름들이 떠올랐다. 초로의 나이가 되기 전에 이미 굵게 패인 이마와 미간의 진한 주름은 그의 억세고 성난 삶을 늘 증언했다. 엄마는 아버지의 주름을 다려주지 못해 안타까워하며 당신의 얼굴에 자글자글 주름을 새겼고, 그 자리가 모자라자 깊게 팔자 주름을 팠다. 나는 그것들이 유전일까 늘 안절부절 했다. 내 몸에 새겨질 주름을 생각하면 끔찍했고, 된다면 그들의 삶을 세탁소에 맡기고 싶었다.

손택수의 시집에는 주름 펴는 일을 하면서도 결국 제 몸에 주름 파는 이들이 있었다. ‘아낙’은 양복의 주름을 펴고 받은 몇 푼의 돈을 가지고, 실한 동태를 한 마리 잡아 명절에 어머님이 드실 전을 지글지글 구웠을 것이다. ‘범일동 세탁소 사내’는 칙칙, 일자의 선로를 따라 증기기관을 운전하여 구불구불 제 고향에 갈 돈을 모았겠지. 고향에 계신 아버지께 식사는 하셨냐며 전화를 한통 했을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주름이 펴진다. 그리고 인물들은 웃는다. 그 웃음을 따라 주름이 그려진다. 여기서 주름을 만드는 일과 펴는 일이 일치함을 나는 깨닫는다. 그 무수한 반복들이 삶을 그려냄을 안다.

그제야 나는 날 선 주름이 없다는 사실을 직시한다. 그리고 그 주름들은‘ 세상의 모든 구불구불한 골목’처럼 손을 맞잡고 있음을 본다. 그 순간, 그 어떤 다리미로도 그것들을 펼 수 없음을 안다. 그렇다면 남은 방법은 하나다. 끊임없이 같은 자리를 반복해서 접어야만 생기는 그 주름의 무게나 가치를 받아들일 수밖에. 그리고 이렇게 만들어진 삶은 모두 굽어서 결국엔 자기를 바라보게 된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하얗고 매끈한, 탄력 있는 피부의 50대 탤런트보다 내 어머니가, 주름이 져 오물거리기만 하던 내 할머니가 더 예쁜 이유를 이제야 찾을 수 있다. 잇몸의 흔적을 따라 있는 주름들을 오물오물 펴며 “어여 와서 이거 무”라고 했던 할머니가 헐거운 몸빼 바지와 늘어난 티셔츠를 입고 아무렇게나 주름들을 널어놓고 있어도 아름다운 이유는 그 삶이 곧 나의 삶이기 때문이다. 삶, 그 자체가 가지는 아름다움, 덕분에 살아내는 사람 모두가 기어코 빛나기 때문이리라.

결국 이렇게, 삶을 살아내는 것은 결국에 제 몸에 주름을 새기는 일인가보다. 그러니 모든 주름들은 예쁘다. 그 주름 속에 알음알음 박혀있는 그 작은 삶들이 귀하다. 이제 내가 할 일은 먼저 산 삶들에 대한 감사와 내 삶의 책임, 그 흔적을 따라 주름을 파는 일이다.

가을, 낙엽이 떨어진다. 나무는 힘겹게 제 몸에 나이테 한 줄을 새기고 있을 것이다. 우리네 고단한 청춘도 한 번을 크게 굽었다 펴면서 제 몫의 주름을 새기고 있을 것이다. 다들 그렇게 살아낸다는 것에 위로를 받고, 또 힘을 내자. 우리의 그 성장에 우리 부모님은 굽을 등을 한 번 펴고 웃으실게다.

이 가을, 쓸쓸한 바람에도 햇살 따뜻한 날, 다들 부모님께 전화 한 통 들이는 청춘을 보내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