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8년의「워싱턴포스트」

1877년, 12월 6일. 「워싱턴포스트」 창간. 김현곤 기자l등록2015.12.12 14:58l승인2015.12.12 15: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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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워싱턴포스트」제호 (출처 : 워싱턴포스트)

1877년, 12월 6일. 「워싱턴포스트」 창간.

민주당의 기관지로 시작한 「워싱턴포스트」는 많은 주인을 거쳤다. 기관지에서 벗어난 뒤, 1905년 존 매클린에게 팔렸다. 매각 이후 「워싱턴포스트」는 선정적인 기사를 주로 썼다. 그의 아들 네드 매클린이 운영을 맡기 시작하자, 「워싱턴포스트」의 명성은 바닥을 쳤다. 네드 매클린은 당시 대통령과 친구였고, 친정부적인 기사들을 쏟아내게 했다.

결국 「워싱턴포스트」는 파산했다. 파산한 「워싱턴포스트」는 유진 마이어에게 인수됐다. 「워싱턴포스트」는 ‘마이어’의 전후로 역사를 나눌 수 있을 정도로 크게 성장했다. 성장의 배경에는 유진 마이어의 사위 필립 그레이엄이 있었다.

「워싱턴포스트」는 그동안 써왔던 선정적 기사를 더 이상 쓰지 않았다. 논설과 사설에 힘을 실었다. 예리한 비판에 평판은 나날이 높아졌다. 1933년 창간한 주간지 「뉴스위크」를 1961년 인수하기도 한다.

하지만 필립은 조울증에 시달렸고, 「뉴스위크」의 여기자와 사랑에 빠져 부인에게 이혼을 요구하기도 했다. 그리고 1963년, 필립은 권총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필립의 부인인 캐서린이 「워싱턴포스트」의 경영을 맡았다.

전설적 편집인 벤자민 브래들리

▲ 캐서린 그레이엄

캐서린 그레이엄은 「워싱턴포스트」의 운영을 성공적으로 이끌었다. 「워터게이트」 사건을 보도하는 데에도 큰 역할을 한다. 하지만 캐서린만이 「워싱턴포스트」의 부흥을 이끈 것은 아니었다.

벤자민 브래들리라는 전설적 편집인이 함께 했기에 가능했다. 벤자민은 「워싱턴포스트」의 뉴스룸을 26년간 이끌었다. 그가 뉴스룸을 맡을 동안 「워싱턴포스트」는 언론상 중에 가장 권위가 높은 퓰리처상을 18회나 수상했다. 「워싱턴포스트」 의 위상이 세계적으로 올라간 데에는 벤자민의 역할도 컸다.

벤자민은 1965년부터 「워싱턴포스트」의 뉴스룸을 이끌었다. 그로부터 5년이 지난 1971년, 벤자민과 워싱턴 포스트는 세계적 신문으로 발돋움하게 되는 계기를 마련하게 된다.

‘펜타곤 문서 보도’가 그 계기다. ‘펜타곤 문서’는 미국의 국방성이 작성한 문서다. 베트남 전쟁의 처음과 끝을 기록했고 문서의 최종 결론은 베트남전쟁이 처음부터 잘못됐고, 최대한 빨리 미군이 철군해야한다는 것이었다. 이 문서가 공개되면 상당한 파장이 있을 것이기 때문에 미 국방성은 문서를 1급 기밀로 취급했다. 하지만, 이 문서를 「뉴욕타임스」가 최초로 보도한다. 3개월간의 취재 끝에 6개면에 걸친 기사를 통해 문서가 공개됐고, 많은 언론들이 “「뉴욕타임스」에 따르면 …”이라는 말을 기사 첫 문장으로 쓰게 된다. 그건 「워싱턴포스트」도 마찬가지였다.

▲ 벤자민 브래들리

닉슨 행정부는 펄쩍 뛰었다. 미군은 베트남 전쟁에 주도적 역할을 했고, 미국 내에서는 반전 여론과 철수를 바라는 국민의 목소리가 드높아진 상황이었다. 법무성은 “국가 안보를 위협한다”는 이유로 기사를 더 이상 쓰지 못하게 하는 소송을 걸었다. 미국 역사상 처음으로, 특정 기사를 보도하지 못하게 되는 명령이 내려진 것이다. 결국 뉴욕타임스는 추가 보도를 할 수 없게 됐고, 「워싱턴포스트」는 뒤늦게 문서를 입수한다. 하지만 「워싱턴포스트」는 고민에 빠졌다. 그때 「워싱턴포스트」의 경영 사정은 좋지 않았다. 결국 벤자민은 캐서린에게 전화를 건다. “갑시다. 보도합시다.” 캐서린의 한 마디에 문서의 내용이 보도되고, 법무성의 소송 대상에는 「워싱턴포스트」도 추가된다. 소송은 대법원까지 올라갔다.

하지만 대법원은 「워싱턴포스트」와 「뉴욕타임스」의 손을 들어줬다. 정부가 국가 안보를 내세워 국민의 알 권리와 언론 자유를 침해해서는 안 된다고 대법원은 생각했다. ‘펜타곤 문서 보도’를 계기로 「워싱턴포스트」는 명성을 얻기 시작한다.

그리고 1년 뒤, 「워싱턴포스트」는 세계 언론 역사에 길이 남을 사건을 보도한다. 민주당 사무실에 괴한이 침입해 도청장치를 설치하려다가 발각된 사건이다.

사건의 뒤에는 ‘펜타곤 문서’에 대해 소송을 걸었던 닉슨 대통령이 있었다.

워터게이트

1972년 6월 17일. 미국의 수도 워싱턴 DC의 워터게이트 호텔에는 민주당 전국위원회가 있었다. 다섯 명의 남자가 그곳에 도청장치를 설치하다가 현행범으로 체포된다. 그 중 한 명은 CIA 출신이었고, 그들의 주소록에선 백악관을 뜻하는 ‘W.H’와 ‘W.House’라는 단어가 나왔다.

「워싱턴포스트」는 워터게이트 사건을 취재하기 시작했지만 쉽지 않았다. 백악관이 CIA를 통해 은폐 공작을 벌이고 있었다. 하지만 「워싱턴포스트」는 취재를 멈추지 않았다. 경영자인 캐서린은 닉슨 행정부가 대대적인 세무조사를 벌였지만, 굴하지 않고 하루에 두세 번 편집국을 출입하며 기사를 직접 검토하기도 했다.

「워싱턴포스트」의 기자인 우드워드와 번스타인은 3년 동안 워터게이트 사건만 취재했다. 우드워드는 정보원이었던 ‘딥 스로트’를 만나 정보를 제공받고, 번스타인은 받은 정보의 사실 여부를 확인하는 역할을 했다. 3년간의 정치 스캔들 보도에 미국은 흔들렸다. 도청장치를 설치한 사람들은 유죄 판결을 받게 된다. 사건의 칼날은 닉슨의 목덜미를 향해 빠르게 향하고 있었다.

▲ 미국 제37대 대통령, 리처드 닉슨

곧 상원 청문회가 열렸다. 청문회는 전국에 TV를 통해 중계됐고, ‘CIA를 통한 은폐를 계획했던 내용이 녹음됐다’는 진술이 나왔다. 특별검사와 특별위원회는 녹음테이프를 제출하라고 백악관에 요구했지만, 닉슨은 “국가 안보를 위해” 법무장관에게 “제출 요구를 무효로 하고 특별검사를 해임하라”고 지시한다. 하지만 법무장관은 닉슨의 요구를 거부하고 사표를 제출했다. 장관의 자리가 비자, 닉슨은 권한 대행인 법무차관에게 다시 특별검사를 해임하라는 지시를 내리지만 법무차관 역시 거부한 채 사직서를 냈다.

당장 녹음테이프를 공개하라는 여론이 우세하자 닉슨은 결국 테이프 내용을 기록한 문서를 제출하는 것으로 합의했지만, 제출한 기록은 대부분의 내용이 삭제돼 있었다. 그 결과, 닉슨을 그동안 지지하던 보수층마저 그를 버렸다. 의회는 탄핵안이 상정했다. 결국, 닉슨은 탄핵안이 가결되기 직전, 자진 사퇴한다. 미국 역사상 자진 사퇴한 대통령의 사례는 이때가 유일하다.

닉슨의 사퇴는 진실의 힘이 이긴다는 것을 보여줬다. 닉슨은 진실을 은폐하려고 숱한 탄압을 했지만, 「워싱턴포스트」는 굴하지 않았다. 캐서린은 그때 폐간까지 각오했었다고 전한다. 「워싱턴포스트」의 뉴스룸에는 벤자민이 있었고, 캐서린과 함께 ‘딥 스로트’의 정체를, 그리고 워터게이트 사건에 대한 취재를 지원하는 역할을 했다. 벤자민은 “매일매일 조금씩 사과를 깨물어봐야 마침내 사과가 얼마나 큰지 알 수 있다. 그것이 워터게이트 보도의 방법이었다”고 회고했다고 할 정도로 세심한 노력을 기울였다.

「워싱턴포스트」는 워터게이트 보도로 퓰리처상을 수상한다. 워터게이트 사건을 취재했던 밥 우드워드의 나이는 당시 30세, 칼 번스타인의 나이는 29세였다.

재닉 쿡, 그리고 지미의 세계

1980년 9월. 「워싱턴포스트」는 또 하나의 특종을 쓴다. 기사를 쓴 사람은 ‘재닉 쿡’이라는 스물여섯 살의 여성이었다.

▲ '지미의 세계'가 실린 워싱턴 포스트 기사.

이 젊은 기자는 마약인 ‘헤로인’에 중독된 여덟 살 ‘지미’가 어머니의 애인에게 정기적으로 주사를 맞는다는 기사를 썼다. 지미의 가족은 3대째 마약에 중독됐고, 지미는 다섯 살 때부터 마약중독자이며, 아이가 사는 집은 죽음의신도 가지 않을 것이라는 기사였다.

지미의 기사가 나간 첫 날, 지미의 이야기는 상당한 충격을 몰고 왔다. 경찰서장은 지미와 그의 가족들을 찾기 위한 조사를 시작하고, 워싱턴 DC 시장은 “지미의 신원을 알고 있다”고 발표했다. 하워드 대학교의 약물남용연구소장이 “지미와 그의 가족을 알고 있다”는 말을 했다는 보도가 나오기도 했다. 시는 발칵 뒤집혔다. 워싱턴 경찰은 지미를 구할 수 있도록 소년의 진짜 이름을 알려달라고 요청하기도 한다. 하지만 「워싱턴포스트」가 거부하자 쿡의 취재노트를 압수하겠다고 말하는 해프닝도 있었다. 수백 명의 경찰과 공무원들이 지미의 신원을 찾았지만 지미는 찾을 수 없었다. 「워싱턴포스트」는 쿡이 다룬 ‘지미의 세계’를 퓰리처상 응모작으로 제출했다. 다른 기사는 응모하지 않았다.

그리고 다음해 4월 13일. ‘지미의 세계’는 퓰리처상을 받았다. 많은 언론들이 쿡을 소개하는 기사를 쓰기 시작했다. 그 중에는 AP통신과 쿡이 한때 일했던 털리도 블레이드도 있었다.

그런데 AP통신과 털리도 블레이드의 기사가 서로 달랐다. AP는 퓰리처위원회의 자료를 근거로 했고, 그 자료는 쿡이 제출한 기록이었다. 털리도 블레이드는 자신들이 갖고 있던 쿡의 인사기록을 근거로 했다. 두 자료는 학력도 다르고 구사할 수 있는 언어도 서로 달랐다. AP의 자료에선 쿡이 파리의 대학에 다닌 것으로 적혀 있었지만 다른 한쪽에서는 파리의 기록을 찾을 수 없었다.

「워싱턴포스트」는 진실을 찾기 시작했고, 쿡은 따로 조사를 받게 됐다. 학위의 검증부터 구사할 수 있다는 4개 국어, 그리고 지미에 대한 기사까지. 학위는 가짜였고, 그가 포르투갈어, 이탈리아어, 프랑스어를 구사할 수 있다는 것조차 사실이 아니었다. 쿡은 자신의 취재원이었던 지미의 집 또한 찾지 못했다.

결국 쿡은 “지미는 없어요, 그리고 가족들도.”라는 말로 진실을 고백했다. 진실 고백이 이뤄지자, 퓰리처상은 바로 반납됐다. 다음날, 「워싱턴포스트」는 1면에 “우리는 사과합니다.”로 시작하는 사설을 게재한다.

「워싱턴포스트」는 ‘재닉 쿡’이라는 이름의 십자가를 영원히 지게 된다. 기자 스무 명이 사건의 전모를 밝힐 특별 팀에 넣어 달라고 했지만 벤자민의 생각은 달랐다. 같은 집안 식구끼리 조사하기 보다는 회사 사정에 밝으면서도 중립적인 시각을 가진 사람이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워싱턴포스트」에는 1969년부터 옴부즈맨이 있었다. 옴부즈맨은 어떤 주제든 자유롭게 쓸 수 있으며 편집될 수 없었고, 해고도 할 수 없었다. 그때의 옴부즈맨은 윌리엄 그린이었다. 그린의 조사 발표는 「워싱턴포스트」의 1면부터 3면까지에 걸쳐 게재됐다. 그린은 “이것은 완전한 조직체의 실수였다. 거기엔 변명이 있을 수 없다.”라는 말로 조사 결과를 끝냈다.

다른 언론사의 주필 중 한 명은 “‘지미의 세계’는 「워싱턴포스트」뿐만 아니라 이 나라 모든 신문의 신뢰성에 손상을 입혔다”고 말한다. 많은 신문들은 취재원에 대한 각자의 정책을 검토하기에 이르렀다. ‘지미의 세계’는 「워싱턴포스트」의 아픈 역사로 남았다.

몰락, 주인이 바뀌다.

▲ 아마존의 창업자 '제프 베조스'

「워싱턴포스트」는 93년, 83만부의 발행부수를 기록했지만, 인터넷 시대가 도래 하면서 종이신문의 위기를 피하지 못했다.

그리고 2001년, 캐서린 그레이엄이 84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캐서린의 사망 소식이 알려지자, 워싱턴의 관공서에는 조기가 게양되고, 영결식은 CNN 등 여러 방송국에서 생중계로 방송됐다. 부시 대통령은 “워싱턴과 전 미국은 흠모를 받아온 미국 언론의 퍼스트레이디 그레이엄 여사의 별세에 삼가 조의를 표한다”고 추모 성명을 발표했고, 국무장관 또한 조사를 통해 그의 죽음을 애도했다.

아들인 도널드가 자리를 물려받았고, 「워싱턴포스트」는 교육사업과 케이블TV사업에 참여했지만 경영난을 헤쳐 나가기에는 역부족이었다. 2009년에는 매주 월요일간 발행되던 경제 섹션을 없애기도 하고, 1961년 인수했던 「뉴스위크」를 2010년, 단돈 1달러에 매각하고 「워싱턴포스트」 사옥을 매각하기도 했지만, 상황은 나아지지 않았다. 「워싱턴포스트」의 발행부수는 93년의 절반 수준인 47만부까지 줄어들었다.

결국 2013년, 영업손실 규모가 상반기에만 4930만 달러를 기록한 상황에서 「워싱턴포스트」는 「아마존」의 창업자 제프 베조스에게 2억5000만 달러, 우리 돈으로 약 2800억 원에 매각됐다. 80년간의 그레이엄 가문 시대는 막을 내렸다.

베조스 시대, 디지털로의 변화

베조스가 「워싱턴포스트」를 인수하기 전, 7년 동안 「워싱턴포스트」를 이끌었던 웨이머스는 “나는 인쇄형 인간”이라고 말할 정도로 「워싱턴포스트」는 혁신과 거리가 멀었다.

베조스는 직원들에게 편지를 보내 “「워싱턴포스트」의 가치는 앞으로도 결코 변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신문의 존재 이유는 소유주인 내가 아니라 독자들”이라고 강조하면서, “변화는 불가피하고 실험과 창조가 필요하다.”며 “앞으로 비용이 얼마가 됐든 뉴스 스토리를 지킬 수 있는 용기도 필요하다”면서 변화를 시사했다.

주식 투자로 유명한 워런 버핏은 「워싱턴포스트」의 이사이기도 했다. 버핏은 “베조스를 기술과 사업수완에서 미국 최고의 CEO”라고 소개하기도 할 정도로 베조스는 탁월한 리더로 평가받고 있었다.

베조스는 「워싱턴포스트」의 경영진을 만난 자리에서 “지금으로부터 10년, 20년 안에 디지털 독자를 획기적으로 늘리기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냐고 물었다. 경영진들은 의아해 했다. 그들이 과거에 받았던 질문들은 “어떻게 2~3년 내에 매출을 늘릴 수 있느냐”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공격적인 사업계획들이 베조스가 「워싱턴포스트」를 인수하면서부터 세워지기 시작했다. 기자들의 추가 채용과 디지털 콘텐츠의 양과 질을 개선하는 내용으로, 속보뉴스의 데스크도 새로 생기면서, 디지털을 위한 투자가 시작됐다. 「워싱턴포스트」가 인력과 예산을 늘리기로 한 건 5년간 처음 있던 일이었다.

「워싱턴포스트」는 디지털을 위한 혁신으로 빠르게 움직였다. 「워싱턴포스트」의 웹사이트 접속수는 베조스가 인수하기 전과 비교했을 때 두 배로 늘었고, 베조스의 회사, 아마존과의 연계도 확대됐다. 하지만, 연금혜택을 삭감해 「워싱턴포스트」 기자들의 반발을 사기도 한다.

그리고 올해 10월, 「워싱턴포스트」는 온라인 접속자 분야에서 「뉴욕타임스」를 제치는 결과를 거뒀다. 우리가 잘 아는 페이스북의 뉴스 공급 정책에도 긍정적 반응을 보였다.

죽어가던 「워싱턴포스트」가 2년 만에 다시 부활하자, 세계 언론사들은 「워싱턴포스트」를 주목하고 있다. 독자를 위한 맞춤 뉴스와, 빠르게 올라오는 속보를 벤치마킹하기 시작한다.

 

1877년 12월 6일. 138년 전 「워싱턴포스트」가 창간됐다.


김현곤 기자  journalist@pc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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