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명의 섬

송귀옥

물뿌리개 들고 옥상으로 가는 윗층 남자를 보았다

집주인에게 가까스로 출입을 허락받은 그곳

그녀는 문에 자물쇠를 채웠다

시간을 잊은 악다구니, 거친 숨소리, 코고는 소리

지하보다 새벽의 옥상은 눈물겹게 고요하다

아무렇게나 버려진 꽁초 같은 그녀의 등

BLESSING HOME

축복의 햇살 받아본 적 없는 사람들이

눅눅한 습기의 입자처럼 스며들었다

곰팡이 포자처럼 가볍게 떠나는 섬

바로 옆집 이름은 행복주택이다

박복한 팔자는 어떤 집에 담겨도

흉하니 불거진다는 걸 주인들은 아는 걸까

가라앉은 섬과 떠 있는 섬 사이의 어느 계단에서

불현듯 그와 마주칠 때

그녀는 꽁꽁 문 잠근 걸 변명하려다 그만두곤 했다

익명끼리는 그냥 스치면 되는 것

한동안 그 남자가 보이지 않는다

대신 옥상 문앞에 빨간 재떨이가 놓여 있듯

빛바랜 화분에선 꽁초 사이로 코스모스가 피고 있다

 

 

상자의 매뉴얼

송귀옥

시간강사를 하다가 택배기사가 되었습니다

힘겨운 상자가 아닌 따뜻한 영혼을 전하고 싶었습니다

제 강의에 목을 맨 학생은 없었지만

저의 상자는 모든 사람들이 반깁니다

삼각김밥의 비닐 벗기다 보면

도처에 뿌리내린 현대의 피라밋이 어른댑니다

몇 년째 전화 한 통 걸지 못한 아내에게서

따끈한 사각의 도시락이 배달되면 좋겠습니다

다단계에서 다음 계단으로 오르지 못한 그녀의 성적표

위반의 윤리학은 상투적 터부입니다

해는 지고 배달 물건이 산더미일 땐

내 몸도 동네 공터에 폐기물처럼 버리고 싶었습니다

가난한 동네엔 엘리베이터가 없답니다

얼마나 많은 계단이 존재하는지 아시나요?

초인종을 누르고 반품 송장을 내밀 때는

내 인생도 교환, 환불 받고 싶어집니다

여기저기 박스 테잎으로 감은 둥근 운전대

아무리 동여매도 삐져 나오는 게 있듯

욱신욱신 낡은 관절에 다시한번 시동을 겁니다

 

오독

송귀옥

미처 삶이 오독인 줄 몰랐네

서평까지 찾아보며 두고두고 음미해도

결국 시는 오독이네

오도독 걸리는 문장을 더듬어

그의 행간 속으로 되돌아가면

내 심장이 씹혔네

한때 사랑하는 이조차 해독하려 든 적 있네

마음 갈피를 뒤적이고 방점을 찍고

숨겨둔 일기장까지 훔쳐 보았으므로 완독한 줄 알았네

책을 파듯 가슴팍을 헤집던 밤

나의 난해한 독설에

각주를 달아 주지도

오독을 수습하지도 않은 채 그는 갔네

아무리 두드려도 열리지 않아

계속 난독중이네, 그를

배재신문  pcnews@pcu.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