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들려도 괜찮아

이재희

고등학교 시절, 엄마는 한창 힘들어하던 나를 차에 태워 무작정 남해바다로 출발했다. 저기 고개 넘어 북한이 보이는 곳에 사는 나에게 남해 바다로 내달리는 길은 멀기만 했다. 길고 긴 길에 지쳐 바깥의 풍경에도 무뎌질 때쯤 온 시야를 다 가릴만한 갈대 한 무더기가 다가왔고, 엄마는 차를 세웠다. 그 때 나는 처음 갈대를 마주했다. 얇고 긴 줄기 끝에는 조금은 무거워 보이는 수관이 하얗게 빛나고 있었다. 제 몸의 몇 배가 되는 무게를 견디느라 흔들거리던 갈대는 쓰러질 듯 쓰러지지 않았다. 그 유연함이 어린 나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게다가 햇빛에 반사되어 부서질 듯 빛나는 황금색은 또 얼마나 감동이었던지. 황금빛인데도 화려함은 온데간데없고, 차분하고, 수수하고, 조금은 애달파 보이는 모습이 왠지 모르게 포근히 나를 감싸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때부터였다. 나는 무수히 많은 나날을 그들에게 위안 받았다. 어떤 가을엔 갈대 속에 숨어서 내 울음을 나눠줬고, 또 어떤 가을엔 사랑하는 사람의 손을 잡고 가서 그들에게 내 사랑을 자랑하기도 했다. 쉽게 발걸음을 떼지 못하고 한참을 멍하니 있다 오는 날도 부지기수였다. 그렇게 순천만 갈대숲은 내 청춘의 안식처였다. 아무에게도 드러내지 못하던 것을 그 곳에서는 꺼내보였고, 그들은 흔들거리며 나를 쓰다듬어주었다. 올 가을에도 이는 변함없었다.

순천만에 갈 때면 꼭 무궁화호를 탄다. 그리고 망설임 없이 매점 칸인 4호 칸으로 향한다. 미처 좌석을 구하지 못한 사람들로 이미 그곳은 만원이다. 우는 아이를 달래는 엄마, 아이들이 뛰어노는 소리, 연인의 속삭이는 소리, 어느 노인의 세월의 소리. 삶들이 만나서 내는 덜그럭거리는 소리 사이사이 기차의 칸과 칸을 연결하는 연결통로의 덜컹거림까지, 소리가 흩어졌다 다시 모인다. 생각해보면 소리에는 생(生)이 담겨있다. 아름다운 음악소리이든 듣기 싫은 외마디 비명이든 모든 소리는 살아있음의 반증이다. 기차 속, 삶의 소리를 들으며 창밖을 바라본다. 기차 안의 모든 것은 흔들린다. 나 역시 마찬가지다. 흔들흔들하는 기차에 몸을 맡기다보면 커다란 창문 밖의 풍경도 흔들린다. 이런 오래된 낡은 기차의 흔들림은 오히려 나를 차분하게 만든다.

강직하고 올곧았던 지난날의 나는 흔들리는 것이 너무 무서웠다. 흐트러지는 모습을 보이는 것이, 자주 울상을 짓는 것이 초라하게만 느껴졌다. 그래서일까 나는 항상 양미간에 인상을 찌푸리고 긴장하며 살았다. 흔들리지 않겠다고. 누구에게도 약한 모습을 보이지 않겠다고. 그런데 한 번 흔들려보니, 흔들리는 삶이 얼마나 나를 차분하게 만들던지.

나는 아주 눈물이 많은 아이였다. 특히 집안에 큰 소리가 나는 날이면 나는 너무나도 작은 존재가 되어 하루종일 울었다. 그리고 그 울음 예기치 않은 순간에 불쑥불쑥 찾아와 일주일이고 한 달이고 나를 괴롭혔다. 어린 나에게 아빠의 커지는 언성, 엄마의 고조되는 울음소리는 모두 내 탓 같았다. 나는 두 분의 사이를 중재하기 위해 아등바등 애썼지만 나아지는 것은 별로 없었다. 그래서 나는 나를 죄인이라 생각했다. 눈이 빨간 내게 무슨 일이냐는 친구의 말에 그냥 몸이 아프다고 얼버무릴 뿐이었다. 누구에게나 아무 일이 없던 것처럼 이야기하면서 아무도 보지 않는 곳에서 나는 더욱 입술을 세게 깨물었다. 아무 소리도 새어나가지 말라고. 그렇게 내 울음은 언제나 소리가 없이 눈물만 있었다.

그랬던 내가 처음 나의 울음소리를 듣게 된 것은 중학교 때였다. 하루는 동이 틀 때까지 다투는 소리로 집안이 들썩거렸다. 한 숨도 자지 못하고 학교에 간 날, 나는 맨 뒷자리에서 혼자 눈시울을 붉히다 갑자기 무슨 이유에서인지 갑자기 소리 내어 울어버렸다. 새어나오는 울음소리를 참을 수 없어서 한참을 엉엉 울었다. 울면서 내가 한 생각은 ‘서럽다’나 ‘힘들다’가 아닌, ‘지금 내 몸이 흔들리고 있구나’였다. 흔들리지 않고자 모든 것을 안으로만 누르고 감내하던 내가 흔들린 최초의 순간이었다.

그래서일까. 무거운 수관을 머리에 이고 흔들리는 갈대가 위로가 되었던 것은. 신경림 시인은 “갈대는 제 몸을 흔드는 것이 제 울음소리인 것을 까맣게 몰랐다”라고 시를 썼다. 울음은 그렇게 제 몸을 흔드는 것인가 보다. 갈대도 그렇게 흔들리며 울고 있었나보다. 지금 생각해보면 갈대가 내게 위안이 되었던 것은 숨어서 울던 내 옆에서 함께 울어준 첫 번째 존재였기 때문이다. 누구나 흔들리며 사는거야. 그것이 진정 사는거야. 괜찮아. 힘들면 울어도 돼. 숨지 않아도 돼. 네 옆에 내가 있어. 그 따뜻한 위로에 나도 모르게 그 갈대숲 속에서 꼿꼿하기만했던 내 삶을 조금 내려놓고, 그들을 따라 유연하게 흔들흔들 했던 것 같다.

흔들리는 갈대를 따라 고개를 까딱거려본다. 너 역시 한가득 차오르는 슬픔을 꾸역꾸역 누르고 살지 않았냐고. 고생했다고 소리 내서 울어도 된다고 소곤거리며 그들의 수관을 쓰다듬어본다. 갈대도 흔들린다. 바람 소리가 난다. 생(生)의 소리가 난다.

다시 속삭인다. ‘괜찮아. 흔들려도 괜찮아.’ 알고 보면 우리 모두가 흔들린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