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픔이 숲을 들 듯이

이민하

죽은 숲은 무엇도 품을 수 없다
무엇도 품을 수 없어서 숲은 다시 죽는다
퀴퀴한 냄새만 남긴 채

모르는 곳에 돋은 가시들
잘려 나간 손톱처럼 즐비한 채
가끔은 과거로.

비밀 한 그루의 뿌리
너희들은 숲을 왜곡하고 부풀린다
편지 말아 피운 향에 홀려 나는 길을 잃었다

살아있는 것을 보려면 가장 시끄러운 나무를 찾아야 한다
땅에는 뿌리가 무수히 엉켜있고
무엇도 잘라낼 수 없음을 안다

이유 없는 무기력함이 없는 것처럼

노을이 질 때쯤 웅덩이에 담긴 빛을 본다

 

눈 속에 파묻힌 편지

이민하

굳이 전해주지 않아도 너는 안다
세상 모든 소리는 떨려서 우리에게 닿고
그사이에는 눅진한 공기

축축한 손에는 젖은 편지가 있다
땅을 푹푹 파서 편지를 심는다
심어놓은 게 때마침 피어날 때
새싹은 겨우 아문 것을 찢어낸다
간지럽기보다 아플 것임을 안다

눈이 반짝이는 건 건조하지 않기 때문이다
물기 없는 눈은 뭉쳐지지 않는다
눈 속에서는 눈이 잘 뭉쳐지겠지

건조한 곳에서 사랑을 외치는 건 무효

 

물기 없는 눈은 뭉쳐지지 않는다
흔들리지 않는 눈사람은 커질 수 없다

축축한 사랑을 눈사람에게 어떻게 건네나요
눈사람이 녹을 텐데

숱한 실패 끝에야 알았다
녹지 않으면 얼어붙지도 않는다는 걸
얼어붙지 않으면 커지지도 못한다는 걸
그걸 사랑 주기 두려워하고서야 알았다

싸라기눈이 푹푹 내리는 날
땅을 푹푹 파 편지를 꺼내고 눈사람을 묻는다
내 마음은 땅속에서 진물이 될 테다
진물은 땅이 흡수할 것이고
상처는 없었던 일이 된다

 

수선화

이민하

축복받으며 피어났다고 했지요
해바라기가 되고 싶었어요
지려는 해를 붙잡을 수 있는 낯짝이 탐나서

해가 지평선에 걸칠 때면 숙여야 하는 고개
고개를 숙일 줄 몰라서 해바라기가 될 수 없었어요

조금 늦게 태어났다면 뜨거운 햇빛을 버틸 수 있었을 텐데

지평선에 해가 걸치면 저 하늘엔 슬픔이 걸려있고
모두에게 공평할 줄 몰랐던 노을

햇살이 뜨거워서 나는 끝내 필 수 없었어요

배재신문  pcnews@pcu.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