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범근(정치언론·4) 주시경교양대학 글쓰기교실 튜터

이제 대학에서 토익 책 대신 전공 책을 잡고 있으면 ‘잉여’가 된다. 이 치열하고도 비좁은 취업문을 뚫겠다는 대학생의 자세가 안 되어있기 때문이다. 요즘 유행하는 말에 ‘잉여’란 단어가 있다. 사전적으로는 ‘쓰고 난 후 남은 것, 나머지’라는 뜻이지만, 요즘은 그 의미가 조금 달라져 ‘주인공이 아닌 들러리, 쓸모없는 존재’란 뜻으로 인터넷상에서 자주 쓰인다. 취업하지 못한 백수 졸업생의 형국이 딱 이와 같다. 그러니 대학과 학생이 합심하여 취업에 목을 맬 수밖에 없고, 그렇게 ‘지성의 전당’은 이내 ‘취업의 전당’이 되어버렸다.

얼마 전 있었던 ‘대학구조개혁평가’에서도 취업이 대학의 중요한 사명임을 재확인할 수 있었다. 총 16가지 평가지표 가운데 ‘졸업생 취업률’이 총점의 10%가량 차지하는 높은 비중이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되니 대학이 앞장서 취업에 유리하도록 학제를 개편하는 일이 심심찮게 목격된다. 우리 대학도 칠예과 폐과를 시작으로 불어불문학과와 독어독문학과를 없애고, 국어국문학과를 통폐합하면서 취업률 낮은 과를 정리한 바 있다.

이렇게 대학이 자신의 정체성을 혼동하는 이유는 ‘시장’에 타협했기 때문이다. 취업시장에서는 구매자인 기업이 갑(甲)이다. 그래서 갑(甲)의 입맛에 맞는 인재와 연구를 위해 대학은 분골쇄신(粉骨碎身)의 노력을 아끼지 않는다. 기초학문보다는 실용적인 학문에 지원을 늘리고 취업에 도움이 되는 방향으로 교과과정도 새롭게 단장했다. 그러다 보니 자연히 기업과 연계되지 않은 학문과 학과는 대학에서 점점 그 설 자리를 잃어가고 있다.

사실 대학뿐만이 아니라 이제는 대학생도 취업을 위해 대학에 온다. 어학점수와 대회활동, 자격증 등과 더불어 학점과 졸업장이 스펙 중 하나가 된 건 어제 오늘 일이 아니다. 3포 세대를 넘어 5포와 n포세대가 나오는 지금, 목구멍이 포도청인 청춘들은 학문 할 시간이 없다. 졸업 이후 취업 절벽에서 낙사(落死)하게 생겼는데 한가하게 앉아 교양서적이나 뒤적이고 있을 시간이 없는 것이다. 비로소 대학에는 취업을 준비하는 다수의 ‘취준생’과 세상물정 모르는 일부의 ‘잉여’로 나뉘게 되었다. 대학 존재의 목적이 거꾸로 뒤바뀐 것이다.

지난주 일본은 경사가 겹쳤다. 노벨상 수상자가 2명이나 될 뿐 아니라 작년에 이어 노벨물리학상 수상자를 연속해서 배출했다. 오랜 기간 기초학문에 대한 그들의 끝임없는 신뢰와 노력이 일궈낸 쾌거가 아닐 수 없다. 기본에 충실했던 자세가 결국 배 이상의 결과로 보답해준 격이다. 대학의 본질은 바로 여기에 있다. 학문과 연구에 충실하고, 그 지식을 다음 세대에 전수하는 역할이 대학 존립의 이유인 것이다. 오늘의 지성이 내일의 지성을 만드는 요람이 바로 대학이다.

그래서 대학에서 공부한다는 것은 취업에 필요한 한 장의 졸업장을 위한 일이 아니다. 어떻게 살 것인지 고민하는 일이다. 우리가 어떤 일을 하며 살지, 사람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지, 세상을 어떻게 대할 것인지 고민하고 한 발을 내딛도록 훈련시킨다. 그리고 그 고민에 도움을 받고자 이전 세대가 쌓아온 지혜의 산물을 잠시 열람하는 것이다.

“대학 졸업장은 한 인간이 완성품이라는 증명이 아니라, 인생의 준비가 되었다는 표시이다.(에드워드 말로이)” 그래서일까. 우리는 4년을 공부해도 결국 모두 미완성으로 졸업한다. 그렇지만 그 기간 학문을 했던 학생의 마음에는 확실한 한 가지가 있다. 바로 스스로 삶을 완성시켜 나갈 수 있는 지혜이다. 비록 학문이 직장을 주지 않을지는 모르지만, ‘삶다운 삶’은 선물해 줄 것이다. 이것이 비좁은 취업문 앞에서도 기꺼이 학문하는 ‘잉여’의 마음 아닐까? 그리고 다시 대학이 ‘지성의 전당’으로 돌아가야 하는 이유가 아닐까?